[광주타임즈]통일코리아 지도자회 이사장 문경주=경향신문 1961년 2월 24일자를 보면, 장면 정부는 태백산맥 개발계획을 세우고 강원도의 영월, 정선, 삼척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무연탄과 철광석을 개발하기로 계획합니다. 그리고 서부독일과 1억 5천만 달러 상당의 현물자재차관을 교섭하여 서독정부의 브렌타노 경제상으로부터 지원약속을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에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가짜영웅 박정희는 7개월 후인 1961년 12월에 서독을 방문하여 차관을 최종 합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쌍용양회 공장은 그 부지가 187만 평이나 되고, 양회를 만들 수 있는 관산의 청원석 채굴 부지만도 179만 평이라고 합니다. 이 공장이 착공된 시기가 1962년 9월이며, 가짜영웅 박정희가 서독에 가서 차관을 조인한 1961년 12월로부터 딱 9개월 만입니다. 독일정부가 시멘트공장을 대한민국에 지어주자면 설계를 해야 하고, 한국정부는 그동안 시멘트공장 건설 부지를 조사하여 선정하고 땅을 강제수용 또는 매입하는 등, 양국정부가 시멘트공장건설 준비를 하는데 9개월은 걸렸을 법합니다. 쌍용양회 공장이 서독차관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1964년 여름방학 기간쯤에 그쪽에 사는 친구 소개로 쌍용양회 영월공장에서 노동 품팔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공장을 짓는 사람들이 독일인이었으며 또한 모든 장비와 자재들이 완전 독일제품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봤던 기억이 아직도 분명한 것은 원석을 실어 나르는 독일제 자동차의 운전 칸이 반쪽짜리로서 조수석이 없는 자동차였고 그런 트럭을 생전 처음 보는 터라 아주 신기해했었습니다. 또한, 독일인 기사들이 일이 끝나면 허리에 차고 다니던 연장주머니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꺼내어 쇠붙이를 모아두는 것이 신기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 사람들은 쇠붙이를 모아서 무엇 하려는 것이냐고? 묻자 한국인 관리들은 머리를 흔들며 독일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며 물자를 절약한다고 무엇이든 땅바닥에 구르는 것으로 가치가 있어 보이면 아무것이나 다 주워 모은다고 흉을 봤던 겁니다. 그 당시의 독일인 기사들 사무실 앞에는 한쪽이 개방되어 비어 있는 드럼통들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 안에는 독일 기사들이 주워 모아둔 못, 철사, 철근 동강 등이 가지런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실상을 보면서 독일인의 물자절약 정신과 근면 성실성 등 선진국 사람들다운 면모를 느꼈습니다.
그렇게 1차에 건설된 쌍용양회 영월공장은 분명 민주당 정권 때부터 약속된 태백산맥 개발차관을 가짜영웅 박정희가 케네디를 방문했을 때를 맞춰 승인해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세계가 5·16쿠데타를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도 의회로부터 한국원조를 승인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독일정부가 아무리 가짜영웅 박정희가 딱한 사정을 간절하게 부탁하더라도, 미국 눈치 안 보고 독자적으로 차관을 제공하겠습니까? 아마도 미국의 권고가 아니라면 가짜영웅 박정희를 만나주지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964년도에 가짜영웅 박정희는 또다시 독일을 방문하여 차관을 더 얻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민주당 정부와 약속했던 2차분은 쌍용양회 공장 확장공사 자금으로서 태백산맥 개발차관의 2차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5·16쿠데타가 1961년에 5월에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최고회의 의장은 6개월 후인 1961년 11월 14일 처음 외국 나들이로 미국을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승인받은, 약 3주일 후인 1961년 12월 8일에 두 번째 외국 나들이로 서독을 방문해서 1억 5천 마르크의 차관을 처음으로 얻어왔다는 겁니다. 5·16쿠데타 후 장도영 제거 및 군부 갈등 등, 내분 수습에도 벅찬 시기였으며 불과 6개월 동안에 언제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얻었다는 주장입니까? 그런데도 더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믿는 국민이 90%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