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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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76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5.2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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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통일코리아 지도자회 이사장 문경주=당시의 만주국 군관학교 지원 자격요건 1) 20세 이하의 남자일 것 2) 반드시 미혼일 것 3) 만주국에 1년 이상 면적(주민등록)이 등재해 있을 것 4) 단, 간도 특설부대에서 공비(독립군)를 잡는 등, 공을 세우고 부대장으로부터 유훈 심사를 통과하여 추천을 받으면 위의 조건을 적용치 않는다. 박정희는 15세에 대구사범대학에 입학했고 이어서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서 김호0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따라서 박정희가 대구사범 5년 수업 후인 1939년이면 22세가 된다.


그러므로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들어가기엔 모든 조건에서 지원 자격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만주국 군관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 박정희측은 물론 그를 비판하는 세력들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고할 사항은 박정희에 관한 모든 자료들은 박정희 측에서 흘려준 것들입니다. 즉, 혈서까지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박정희는 친일한 사람이 아니라며 독립군을 소탕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공비만 잡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일본군 입장에선 공비이지만 대한민국 국민입장에선 독립운동 투사들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박정희에 친일 자료들은 역설되게도 박정희가 친일하지 않았다는 자들이 반론의 증거로 제시한 자료에서 친일 증거들이 발췌되고 있습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세력들은 그에 대한 자료를 원하는 대로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대구사범을 수학한 후에 의무교사 복무기간과 관련하여 사비생도(私費生徒)는 3년간을 재직해야 하고 관비생도(官費生徒)는 5년을 근무해야 하므로 박정희는 1940년 3월 31일까지 의무교사 재직기간 3년이 채워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1940년 3월 31일까지 문경보통학교에 근무했기 때문에 간도특설부대에 근무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언제까지가 의무교사 기간일까요? 박정희는 1939년 3월 31일까지 2년간만 의무교사로 근무하면 된다는 주장과 함께 항간에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의 죄상을 밝히려는 측은 사비생도는 2년간이 의무교사 봉직기간이고 관비생도는 4년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그를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관비생도는 5년간이 의무교사 봉직기간이고 사비생도는 3년간이 의무교사 봉직기간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두 가지 주장 중에 어느 한쪽은 거짓말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2년간 의무교사 복무기간인 이
유를 들어 보면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자기모순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3년간 의무교사로 근무해야 한다면 1939년 3월 31일자에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1939년 10월에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치르는 것도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Ω증거주의 법치는 오히려 범죄를 감춰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이 1937년 4월 1일입니다. 그러므로 1940년 3월 31일까지 근무해야 3년이 됩니다. 그런데 5개월 전에 군관학교 시험을 치러 가는게 가능할까요? 박정희가 2년간 의무교사 복무기간을 마치고 만주국 군관학교를 지원하려 한 정황적 증거를 살펴봅시다. 먼저 가짜영웅 박정희가 만주국 부의 황제에게 보낸 혈서를 소개한 신문기사의 사본을 아래 자료로 제시하겠습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박정희는 일본에 ‘견마(犬馬)와 같은 충성과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다 하겠다는 혈서로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 ‘혈서 군관 지원’으로 보도된 내용이 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3년간의 의무교사 봉직기간을 채워야 한다면 1939년 3월 31일 이전에 만주국 군관학교를 지원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겁니다. 만 2년이 되는 해에 박정희는 의무교사 봉직기간자로서 1937년 4월 1일자에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므로 1939년 3월 31일이면 정확하게 2년을 채우는 것이며 따라서 위의 신문보도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 기간에 맞게 군관학교를 지원했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박정희가 보낸 군사우편 엽서입니다. 박정희는 목단강에서 경성부 예지정예지동 町洞(정동) 43번지 김정식(金定植) 씨에게 보낸 군사우편으로 정황을 살펴봅시다. “재신(再信)… 재작일(再昨日) 3일에 전 학과 고시(考試)와 체격 검사를 다 마치고 지금 각지 구경을 다닙니다. 금(今) (5일 夜) 야(夜) 9시 4분 기차로 출발하겠습니다. 경성 착(着)이 7일 오전 7시 2분경 되오나 기차 연락(聯絡)이 곧 있으므로 형 댁에 왕방(往訪)치 못하고 직행하겠습니다. 모쪼록 안녕하십시오. 불비(不備).” “직행하겠습니다. 모쪼록 안녕하십시오. 불비(不備).”이 군사 엽서를 잘 해석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영어를 보면 CARTE POSTAL(칼트 포스탈)로 되어 있습니다. 포스탈은 우편이란 뜻이지만 CARTE(칼트)는 호전적인 군사용어입니다. 즉, 칼을 상대방의 심장에 겨눈다는 뜻입니다. 물론 ‘펜싱’이란 뜻도 있지만 펜싱 역시 군사용 칼싸움입니다. 따라서 이 군사우편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군 내부에서 공급받고 또한 군사우편 행랑으로 발송되는 겁니다. 따라서 위의 엽서는 우표 처리가 없으며 접수인(도장)이 찍히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군무원이 아니고 어떤 군인 누군가에게서 군사용 우편엽서를 구해서 부대 밖에 있는 우체통에 넣었다면 반드시 접수한 우체국 명이 들어간 소인(消印)이 찍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편엽서에는 소인이 없으며 군대 내부에서만 통용 발송된 군사우편 엽서로서 일반 우체국에서 접수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군인에게 부탁하여 부대 안에서 엽서를 발송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이유로서 검열을 받아야 하는 군사우편 제도상 군인이 아닌 자의 우편을 걸러내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을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처음 한번 보내는 편지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하게 재신(再信)이라고 표기했습니다.       

          
  <▶77회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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