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스스로 노력으로 바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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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스스로 노력으로 바꾸는 것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6.2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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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신안교육지원청 교육장 김재흥=추억은 계절이 어제를 쌓아 놓은 흔적이자, 기억의 편린(片鱗)이다. 바늘처럼 꽂히다가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계절은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의 정수리를 끌면서, 기억이 과거의 시간을 뚜렷하게 빗장을 쳐두었기에, 향수어린 단편들을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리는 것이리라. 문득 올려다 본 하늘, 구름 몇 가닥이 털실처럼 풀려 나오면 유년의 기억은 과즙처럼 흘러내린다.   

질그릇처럼 깨어질 수도 없어, 심장 깊숙이 박혀 사금파리처럼 빛날 수밖에 없는 그리움의 근원이 바로 추억이다. 철길을 양쪽 겨드랑이에 낀 채 지퍼를 올리듯 흰 거품을 물고 색색거리며 올라오는 증기기관차, 쇠막대로 연결된 네 바퀴의 요란한 회전을 따라 분사된 수증기의 기적(汽笛)이 황혼을 물고 북녘으로 사라지면 단풍이 지고 흰 눈이 내렸다.

떠나는 자들의 눈물과 회한이 서린 득량역, 닫힌 내부에서 외부 세계를 이어 주는 증기기관차는 공간 이동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 시절 득량역이 안(內部)이었다면 광주나 벌교, 순천 등은 밖(外部)이었다. 안과 밖의 경계에서 기차를 타는 순간 내부에서 외부로 펼쳐지는 신세계는 폐쇄된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차원이 바뀌는 타임머신이었다. 그때마다 목마른 갈증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이들은 향수병의 숙주도 봇짐과 함께 기관차에 오르곤 했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소리내어 발음하는 것 보다는 침묵으로 여물어질 때 더 값어치 있게 보일까. 아버지의 고단한 일생과 어머니의 평생 한(恨)의 멍울이 스며있는 곳, 접목된 현재의 일상이 몸살을 앓고 있지만 그 자취는 너무나 적막하고 평온하다. 하루 수십 번의 요란한 굉음을 내던 시커먼 기적(汽笛)이 요즘은 골격만 남은 무궁화 열차로 하루 두 번을 오가며 한산한 목청을 달래고 있으니 참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그동안 사십 여년이 흘렀다. 산천이 침묵하는 동안 사람들은 주름진 땅으로 저문 날의 석양처럼 사라졌다. 떫었던 시간들이 묵혀진 보상을 받았는지 득량역은 지금 빛깔도 예쁘게 발효되고 있다. 한동안 소멸되어 기억조차 흐릿해졌다가 되살아나고 있기에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추억의 거리로 명명된 득량역에 70년대 아련한 기억들이 스멀거리며 사람들을 하나 둘씩 불러 모은다.

기차에서 내리면 예전에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보았던 때 묻은 오르간이 관광객을 맞는다. 벚꽃의 흩날리는 군무(群舞)에 시름을 벗어버리고픈 삼월의 득량역은 전국에서도 몇 안되는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봉숭아꽃이 피는 6월이 되면 S-Train이 부산에서부터 득량역까지 하루 1회 왕복을 한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역(驛) 주변의 풍광도 아름답지만 주변에 형성된 추억의 거리는 7080의 그 시절, 그 거리이다.

만화방, 전파사, 문구점, 다방, 영화 포스터, 득량국민학교 등으로 조성된 거리에서 그 날의 따듯한 기억들을 들추어내는 일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함을 선사한다. 인근의 볼거리 또한 풍성하다. 득량만 수문에 펼쳐진 4km의 장미꽃밭, 예당 들판의 청보리밭을 지나, 비봉리의 거북선 제작소인 선소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전국 최대의 비봉 공룡화석지에서는 신비의 중생대 백악기를 체험하고, 고풍스런 강골의 전통 한옥마을을 거쳐, 오봉산과 칼바위 등을 탐색하는 일정을 잡아 보시라.

그리고 나서 땅거미가 몰려올 즈음 병풍처럼 둘러진 호남정맥의 막내인 봉화산의 실루엣 능선 앞에 서면 이 고장이 얼마나 아름다운 천혜의 고장인지, 눈부신 감탄에 목이 매일 정도이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득량역, 앞만 보고 살아온 시절로 인하여 나의 뒷모습이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화석처럼 굳어진 이곳에, 저마다 하늘 하나씩 받쳐 든 장미의 얼굴 위로 은하수의 별빛이 봇물처럼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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