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기억하는 다리 ‘옛 산동교’
상태바
6·25 전쟁을 기억하는 다리 ‘옛 산동교’
  • /박효원 기자
  • 승인 2020.06.24 17: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 유일의 6·25전쟁 전적지…2011년 현충시설로 지정
군경합동부대, 북한군 탱크에 맞서며 시민들 피난시간 벌어
광주시내권 유일한 6·25 전적지로 알려진 광주 북구 동림동 옛 산동교 모습.
광주시내권 유일한 6·25 전적지로 알려진 광주 북구 동림동 옛 산동교 모습.

[광주타임즈]박효원 기자=광주시 북구 동림동에 위치한 ‘옛 산동교’(이하 산동교)는 6·25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광주유일의 전적지다.

산동교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목포와 신의주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의 일부로 건설돼 광주의 관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6·25 전쟁은 산동교의 운명을 바꿨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도 안된 1950년 7월 22일, 북한군은 장성을 넘어 광주까지 진격했고 이에 맞선 군경합동부대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7월 23일 새벽 4시 산동교를 폭파했다.

전쟁 초기 호남의 방어부대인 5사단 20연대는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파주로 이동했고 비어있던 병력을 채우기 위해 급히 군경합동부대가 새로 편성됐다. 하지만 호남지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집병력은 광주인근 지역 중학생 1000여명과 소수의 경찰병력이 전부였고, 무기는 일본군이 남기고간 99식 소총과 입원 중이던 부상병들의 M1소총뿐이었다. 그마저도 충원 병력의 10%만 무기를 휴대했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군은 7월 19일과 20일 전주를 함락시켰고, 장성을 넘어 광주로 내려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진 왼쪽은 6·25 당시 산동교의 모습으로 1950년 7월23일 새벽 4시 국군이 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다리 상판을 폭파했다.         /광주지방보훈청 제공
6·25 당시 산동교의 모습. 1950년 7월23일 새벽 4시 국군이 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다리 상판을 폭파했다. /광주지방보훈청 제공

 

 

군경합동부대는 탱크 3대를 앞세우고 전진하는 북한군을 방어하기 위해 결국 7월 23일 새벽4시 산동교를 폭파했고 주변 산등성이에 진지를 편성해 교전에 대비했다.

7월 23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 제6사단은 탱크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른다. 병력 규모가 1개 대대에 불과했던 우리 방어군은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지만 북한군에 끝까지 맞서 저항했다.

1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북한군을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군경합동부대는 23일 여수방향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숨 건 저항 덕분에 많은 광주시민들은 피난할 수 있었다.

이후 산동교는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면서 철거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광주의 유일한 6·25 전쟁 전적지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에 무산됐고 2011년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6·25 전쟁 70주년,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과 아픔을 간직한 옛 산동교는 분단된 나라의 비극 그 굴곡진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영산강 물결위에 여전히 서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