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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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꽃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8.1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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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어느 새 배롱나무가 그 투박하고 수수한 붉은색을 밀어 올렸다. 지자체마다 도로변에 줄지어 심어 놓아 7월이면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여름 꽃임을 충분히 느끼도록 지척에서 대할 수 있다. 배롱은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서 더 붉게 핀다. 더위나 가뭄에도 힘들지 않게 선홍색을 우려내는 것으로 보아 필시 여름과 친한 꽃이다. 용광로 같은 폭염을 뚫고 여름을 밝혀주므로 여름꽃이라 해도 무리 없을 것이다.

온 산하가 초록인 세상에서 배롱이 피워내는 붉은 색은 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 원래 배롱나무는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자생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 불렸는데 고려 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리저리 방향 없이 구부러진 가지와 미끈한 거죽을 가진 배롱나무는 백일동안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목백일홍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굳이 ‘목’자를 붙이기 싫어 그냥 편리한 발음으로 ‘배롱’나무로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화초 전문학이나 식물학에 대하여 전혀 공부를 해보지 않았기에 더 이상 쓸데없는 상상력을 발휘했다간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어느 꽃이 백일 동안이나 지지 않고 필 수 있을까? 실제 백일 동안이나 핀다는 멕시코의 잡초였던 국화과의 백일홍은 지금도 지치지 않고 꽃대를 힘차게 밀어 올리며 마당 한쪽을 장식하고 있다. 지난 6월에 심었는데 아직도 거뜬하게 버티고 있으니 더 지켜 볼일이다.

배롱 역시 개화 기간이 백일이나 된다고 하였으나 그 명성이 도종환 시인의 관찰력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실제로 배롱꽃을 살펴보면 연약하기 이를 데 없고 가냘프기 그지없다. 만지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으며, 간지럼을 피우면 금방이라도 함박웃음을 흩날리며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다. 그런 배롱꽃이기에 꽃잎 하나가 지면 다른 새 꽃이 또 피고 지고, 피어서 백일을 지킨다는 것이다. 어찌 그 치열한 연속성에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벚꽃은 잎 하나가 피어서 지고 말면 그 뿐이다. 후속 타자를 키워내지 못하니 벚꽃이 피는 시기에 비바람이라도 불어서 날궂이를 하면 바로 벚꽃 잔치는 끝나 버린다.

그나저나 꽃은 오래 두고 보아야 진국이다. 세상에 십일을 넘기는 꽃은 드물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사람의 권세와 권력도 십년을 넘기지 못한다. 백성들의 힘이 미약했던 과거에 박정희 18년 정권이야, 갖은 술수를 써서 지탱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런 장기 집권은 그림의 떡이 되었다.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도 그렇고, 우리의 정치권력도 십년 주기로 바뀔 판세를 갖추었다.

앞선 꽃이 지고 나면 뒷꽃이 다시 꽃을 피워 기어이 여름 한 철을 환하게 지켜내는 배롱에서 그 질긴 치열함을 본다. 따가운 햇살의 열병을 이겨내며 무서리 내릴 때까지 계속 피워대는 그 열정은 어디서 나올까? 첫사랑의 신열을 앓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단번의 눈꽂힘이거나, 혹은 진득한 온열의 마찰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치열함에서 왔거나……. 분명한 것은 치열하게 피었다가 시들어가다 다시 치열하게 피어나는 것,

교육에서 치열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 번의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행동이 변할 수 있다면 학교의 존재 가치는 시들해질 수도 있겠다. 고학력의 학부모나 학원가에서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아 교육에서 하나의 동작 수행을 위해 특수교사는 수천 번의 반복적 훈련을 통해 하나의 작은 몸짓을 완성한다. 아니 수만 번의 수행 과정을 반복해도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일반 교육도 하루 아침에 한 번의 지시나 가르침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수없이 꽃을 피워내는 배롱꽃처럼 무한한 연속성을 가진 반복적 지도와 훈련이 필수다. 이 평범한 지도 원리를 무시하고 자꾸 새로운 교육과정, 새로운 방법만 찾다보니 내면화된 가치는 없고 겉멋만 화려하게 치장된다. 그간의 교육과정이 잘못되거나 내용이 빈약한 게 아니었다. 이끌어야 할 사회와 정부가 우리 교단이 밟고 올라갈 교육 사다리를 잡고 흔들어서 오르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교육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교단을 간섭하고 재단한 결과 오늘날 우리 교육 현장이 참 어려워졌다.

지금쯤 명옥헌에는 저런 낌새를 알아차렸다는 듯 배롱꽃이 치열하게 앞다퉈가며 장관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으니 올 여름엔 꼭 찾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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