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 그 낯선 편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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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 그 낯선 편리함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8.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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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신안교육지원청 교육장 김재흥=다이아몬드 헤드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리상으로는 분화구의 중심에서 이십여 분이면 충분하였을 거리가 정상에 오르기까지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으니 거의 두 세배의 시간을 더 쓴 셈이다. 실용을 추구하는 유럽인들의 의식을 감안하였을 때 이것은 편리함을 배반한 역기능이다. 그러나 등산로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면 이해의 강을 건너 곧 감동으로 너울거린다.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계곡 사이를 비집고 오르다가 바위틈으로 연결되고, 갈지(之)자로 좌우를 돌아 위에 오르는 사람과 아래에 오는 사람이 서로 눈길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어긋나 있다.

산에 수목이 없으니 정상이나 평지에서 보면 등산로가 훤히 드러나야 함에도 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편리한 능선길을 놔두고 굳이 계곡 사이 바위틈을 고집한 길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이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다 만족한 포함조건으로 읽혀진다.

길지 않은 등산로에 등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면 그들의 혜안을,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은 길을 만들어 자연 파괴를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이었다면 그들의 가슴을 여는 감성을 느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새삼 선진국 사회가 왜 강국이 되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저 꼭대기에 이르는 등산로를 어떻게 내었을까라는 질문이 하산하는 내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조르조 데 기리코의 그림은 대하는 동안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반인반수의 등장인물, 대상을 왜곡하는 상징, 어둠을 대변하는 긴 그림자, 원근이 파괴된 형이상학, 낯선 경외감 등이 회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이른바 모더니스트의 실험에서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왕래한 전형적인 영감의 화가이다. 결국에는 아카데믹한 고전풍으로 돌아간 그의 바탕은 불편함이었다. 불편함은 그의 성장의 요체요, 정신의 활화산이었던 셈이다.

편리함에 익숙하면 불편에 대한 면역력은 사라진다. 우리는 조그마한 불편에도 목숨에 사활이라도 건 듯 분노를 표출한다. 불편함이라는 것이 도덕이나 선을 파괴하지 않고 편리함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불편은 당장 효율성과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같을지 모르나 느긋하고 여유로움을 상징하는 대기만성의 공동선이다. 그 불편이 성장하면 완성으로 가는 편리함이요, 모두의 선을 이루는 공익과 도덕이 완성된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다.

불편이 짜증지수를 높이면 높아질수록 욕망은 커지고 마찰은 증가한다. 그러나 불편을 익숙함으로 받아들이고 성장이라는 내성을 향상시킬 때 인간성 회복의 탄성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작은 불편을 극복하는 일, 모두의 선을 위해 필요할 때이다. 지하 주차장의 구석진 곳에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하면 관리사무소에서는 단번에 통신 용역회사에 연락해 핸드폰 기지국을 설치해 버린다. 조금만 외부로 걸어나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우리는 굳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등교할 때면 학생들을 학교 정문까지 자동차로 데려오는 부모들, 그들은 자녀의 걸을 권리를 빼앗는 것은 물론이요, 하체 단련의 기회마저 박탈하고 있다. 조금 걷는 일을 불편해 하고, 편리한 욕망의 끝자락만 추구하면서 편리함만 완성하다가 정작 성인이 된 이후, 그가 진출해야 할 사회의 충돌과 마찰에는 어떤 신호를 보내게 될까? 걷는다는 것은 나의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른이던 학생이던 많이 걸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주산을 배우고, 원고지에 글을 쓰고, 앞차의 느린 출발을 여유 있게 바라보는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 결국에는 편리함을 완성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엘리베이터 대신에 계단 오르기, 에어컨 바람이 나오지 않는 적당히 더운 사무실을 더 좋아하기,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더라도 짜증을 내지 않기. 그리해 핸드폰 기지국이 더 많이 철거돼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다.

코로나19가 재확산으로 가는 요즘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턱마스크가 아닌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기 등 질본이 요구하는 대로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일 등은 결국 나의 조그만 불편함을 넘어 대다수 국민의 공익과 안전을 지키는 일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때에 따라서는 내가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조금은 어설프고 낯설게 내가 걸어 온 삶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내일을 여유 있게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시대에 뒤진 대규모 길거리 군중대회 등으로 코로나19를 더욱 확산하게 해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어떤 민족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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