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裸木)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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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裸木)을 위한 기도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9.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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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신안교육지원청 교육장 김재흥=계절은 바람의 결을 따라 햇살을 모았다 흩어놓기를 반복하더니 기어이 빛깔 좋은 가을을 풀어 놓으려는가.

무수한 작살들이 투망질을 하듯 찍어대던 지난날의 곪은 상처들은 미처 아물지도 못했는데, 세월은 이렇게 불확실의 시대가 낳은 명암의 징후를 도처에 뿌려 놓았다.

그 많은 화살들은 어디에서부터 머리채를 풀어 헤쳤는지, 철새들의 안식처가 되었을 무성한 가지들, 다다귀다다귀 움츠린 이파리들의 이마에 날숨을 맞추어 보며 이런저런 소망을 가져 본다.

계절에서 순리를 찾아, 장차 꽃물이 들 푸른 싹들의 아가미에 간절한 입김을 넣으며 아침을 맞이하게 하소서. 다가올 침묵은 가일층 경건함으로 다져지며, 남은 한 해도 모든 이가 바라는 소망의 문턱을 넘게 해주소서.

객관적인 분별력과 진실이 실종되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우리의 서러운 눈물을 어디에서 닦아낼 것이며, 공정을 유지해야 할 저울은 한 쪽으로 기울어버린지 오래인데, 언제쯤 복원된 모습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을런지, 올바른 판단과 인고의 올곧은 시선을 갖출 수 있는 용기는 어느 하늘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지….

빵빵하게 수액을 머금은 은행잎의 등허리를 들여다보며 지난날의 찬바람이 부메랑 되어 모질게 되돌아오지 않기를 소망하소서. 우리의 크지 않은 작은 마음들이 가난보다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 가을을 풍요롭게 품어 안기도록 가득한 기쁨으로 채워 주소서.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와 같은 자조 섞인 탄식이 새어나오지 않게 튼튼한 여백과 철책으로 우리를 지켜 주소서. 새들의 부리에서 흐르는 노래마다 정겨운 축제가 되는 나날이 되게 하여, 계절의 침묵이 더 깊은 침묵으로 끝나지 않도록 순수한 처음을 지키도록 도와 주소서.

간이역의 어디쯤에서 공허로 찌든 일상을 내려놓고 고독의 향기를 이식하는, 사색으로 충만한 발자국을 내딛게 하소서. 핍박으로 물들고, 사랑마저 짓이겨진 메마른 곳에 축축한 온기의 손길을 보충해 주시고, 몸은 비록 허약하더라도 총명한 시선과 지혜로 가득한 나날들을 예약하소서.

날마다 그려지는 삶의 무늬는 나와 당신의 거리를 좁히는 격자무늬의 끈으로 묶여질 수 있는 직조의 언어로 알록달록 채워주소서. 날마다 푸석한 하루의 일과일지라도 나팔꽃 같은 여린 일상에 폭풍우 같은 고통이 몰려오지 않도록 모든 폭압의 근원을 잘라내어 축복의 광장을 약속하소서.

내가 만난 당신마다 인연이었음을, 백설처럼 고요하고 소중한 흰빛이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삶의 고단에 짓눌려 쳐져가는 어깨들이 있다면 더 큰 사랑으로 일어나, 팽팽한 포만의 심장으로 뚜벅뚜벅 걷게 하소서.

속도에 길들여져 모두가 달리고만 있는 우리들에게 이 가을은 천천히 걸으며 통찰의 빈터에서 하늘의 여백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주소서. 지난 바람의 횡포는 생각보다 깊었고, 사려깊지 못한 인간들이 내뱉는 의미 없는 말들의 잔치를 미련없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실의에 빠진 눈과 귀를 열고 멀리 볼 수 있는 터널 밖 시야로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가을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 아이들의 인성과 배움이, 교직원들의 삶과 열정이, 시민들의 자유와 평화가 무대 위의 컨베이어벨트를 벗어나, 인식과 감각이 새롭게 열리는 시공을 넘나드는 도약이 되게 하소서.

새들이 떠난 빈 둥지에도 가시 깊은 탱자 울타리에도 우주의 입김과 햇살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도록 묵상하게 하소서. 작은 일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등불이 다시 켜지어, 나와 당신과의 사이가 튼튼한 우정의 고리로 연결되도록 하소서.

우리가 머무르는 이곳이 멀리서도 빛나도록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힘을 주시고, 나를 위해 살되 나만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시고, 일찍이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참회와 성찰의 시간을 되돌려 주소서.

때때로 사랑은 기적처럼 아름다운 여정이며 용기 있는 모험임을 알게 하시고, 뿌리에게는 더 깊이 내려가 수액을 찾는 간절함이 배어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실의에 빠진 이 땅의 헐벗은 나목들에게 새 햇살과 단비의 계절이 가득하도록 인도하소서.

※ 그동안 소인의 졸고에 관심을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머지 않아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김재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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