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원한 잊겠다”…전두환 숨진 날 5·18 유공자 목숨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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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원한 잊겠다”…전두환 숨진 날 5·18 유공자 목숨 끊었다
  • /박효원 기자
  • 승인 2021.11.2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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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 故 이광영씨, 40년간 하루 6번 진통제 주사로 버텨
5·18 당시 부상자 구조하다 계엄군이 쏜 총 척추 맞아 하반신 마비
5·18 청문회, 검찰, 재판서 헬기사격 등 ‘그 날의 진실’ 또렷이 증언
고(故) 이광영씨 사진. 향년 68세. /독자제공
고(故) 이광영씨 사진. 향년 68세. /독자제공

 

[광주타임즈]박효원 기자=1980년 5월, 광주진압의 실질 책임자였던 전두환씨가 사망한 날, 40년이 넘도록 5·18 부상 후유증에 시달려온 60대 피해자가 안타깝게 숨졌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자들을 구조하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이광영(68)씨. 이씨는 전씨가 숨진 지 반나절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씨는 지난 22일 오후 4시쯤 자택에 유서를 남기고 떠나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유서에는 ‘통증이 심해져서 힘들고 괴롭다. 5·18에 대한 원한, 서운함을 모두 잊겠다. 아버지 품으로 가겠다. 가족에게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같은날 전북 익산에 있는 거주지에서 고향인 강진 군동면 한 저수지까지 170여㎞를 직접 운전했고 사망 장소에 도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씨는 같은날 오후 11시15분쯤 사망 장소와 5㎞ 떨어진 지점에 있는 폐쇄회로(CC)TV에 포착됐다.

경찰은 타살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고 사망 원인을 자살(익사)로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5·18 당시 부상당한 시민군을 돕다 척추관통상을 입은 이씨는 수십년간 통증이 심각해 하루에도 6번씩 통증 완화 주사를 맞았다.

그럼에도 이씨는 배우자와 함께 학교 부식을 납품하는 일을 하며 주로 운전을 도맡았고 만화 가게, 치킨집을 운영하는 등 생계를 유지했다.

이씨는 통증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10여년 전 광주를 떠나 강원도 태백에 있는 산속에서 생활하다 지난해부터 전북 익산에 있는 요양지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평소 우울증 증세 등 지병은 없었고 가족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와 40년지기 친구인 조봉훈 5·18 구속부상자회 회원은 “통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산으로 바다로 정처없이 떠돌다가 일주일 전 쯤에 전화가 왔다”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황망하다”고 애통해 했다.

강진이 고향인 이씨는 군복무를 마친 뒤 전남의 한 사찰에서 승려로 생활했다. 1980년 5월18일 부처님 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러 광주 증심사에 왔다가 계엄군 총탄에 쓰러진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일을 돕게 됐다.

80년 5월21일, 시민들의 구조 요청을 받고 광주 구시청 사거리에서 백운동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다 계엄군이 쏜 총에 척추를 맞아 하반신이 마비됐다.

이씨는 1980년 초 부터 고(故) 조비오 신부와 함께 광주 도심 상공의 헬기 기관총 난사 목격담을 증언해 왔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때도, 1995년 5·18 헬기사격 검찰 수사 때도 ‘헬기사격으로 젊은 사람들이 쓰러졌고 적십자병원으로 이송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9년 5월13일에는 전두환씨 사자명예훼손 1심 재판 증인으로 참석해 “헬기가 총을 쏘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또렷이 증언했다.

이씨의 유족은 “5·18민주화운동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며 “휠체어에 탄 채 진상규명을 외치다 가택연금도 당하며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평생 고통 중에 사셨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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