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로 뒤바뀐 삶…고통 속에 산 형님, 보고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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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로 뒤바뀐 삶…고통 속에 산 형님, 보고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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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5.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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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중진 열사 동생 서삼진(64)씨, 2년 만에 묘지 참배
계엄군 무차별 구타 당한 뒤 항쟁 동참…온갖 고초 겪어
“평범했던 삶 송두리째 망가졌다…가족도 무너져” 탄식
15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서삼진(64)씨가 친형인 고 서중진 열사의 묘비에서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15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서삼진(64)씨가 친형인 고 서중진 열사의 묘비에서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광주타임즈] “(형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그저 하늘에서는 모든 고통을 잊고 편안하길 바랄 뿐입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에 참여했다가 지병으로 세상을 뜬 고 서중진 열사의 동생 서삼진(64)씨는 15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내 형의 묘소에서 “그저 먹먹할 뿐”이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날 서 열사 묘를 참배하고자 보성에서 올라온 그는 주름이 깊게 패인 손으로 형이 생전 좋아하던 커피를 봉분 곳곳에 뿌리며 괜한 미안함과 먹먹함을 풀었다.

서씨는 “계엄군만 아니었으면 형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 열사는 1980년 5월 당시 전남 보성에서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5월 18일 남광주시장으로 가구재료를 사러 올라왔던 그는 귀갓길에 계엄군을 만나 수 시간 동안 구타를 당했다.

이름 모를 한 중년 여성이 길 가던 중, 서 열사를 구하면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서 열사는 계엄군을 향한 울분을 안고 시민군에 가담했다.

끝내 5월 27일 옛 전남 도청에서 최후항쟁을 벌이다 연행된 그는 상무대의 영창으로 끌려갔다.

수 개월 동안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1년 1월이 돼서야 석방돼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지만, 모진 고문 끝에 다리를 크게 다쳐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서 열사를 곁에서 돌보던 가족 역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가업이었던 가구점이 문을 닫으면서 가세는 기울었다.

국가 보상이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던 서 열사는 지난 2009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런 형을 추모하기 위해 서 씨는 매년 민주묘지를 찾았지만, 코로나19 감염 확산 탓에 최근 2년여 동안 참배하지 못했다.

설과 추석, 5월마다 묘소를 찾아왔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명절 추모가 제한돼 민주의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서씨는 “심적으로 크게 지치지만 하지만 형의 한이 풀릴 때까지 묘소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형이 그립고 또 보고싶다. 형이 하늘에선 편안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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