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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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 광주타임즈
  • 승인 2024.10.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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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발행인 칼럼]백형모 광주타임즈 대표·발행인=우리에게 ‘의병의 날’은 두 개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란 광주시민 특히 광산구민을 뜻한다.

정부가 2010년에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한 대한민국 기념일이 있고 15년 전에 광산구가 어등산 일대의 항일의병운동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어등산 의병의날’이 또 있다.

정부가 정한 6월 1일은 작은 달력에도 의병의 날로 기록하여 기념일임을 알리고 있지만 광산구가 정한 의병의 날은 어느 달력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그 숭고한 독립운동 후손들의 우리들의 가슴에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다행히도 광주에는 호남한말의병기념사업회라는 것이 그 뜻을 이어받고 되새기는 일을 하고 있어 위안을 준다. 25일 보문고에서 열린 제15회 한말의병추모제 및 어등산 의병의날 기념식은 이 사업회가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얼마나 힘들게 이어오고 있는가를 절실히 입증했다. 

한말의병사는 뜻으로 봐선 구국정신의 표상이요, 호남 저항정신의 표본이다. 어찌보면 현대사에서 겪은 5.18민주화운동의 뿌리이자 정신사의 본류다. 다만 전자는 100여 년 전의 역사이고 후자는 40여 년 전의 살아있는 역사라는 점이 다르다. 전자는 흐르는 세월 속에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응집력과 세가 약하고 후자는 현재도 거대 세력단체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일까. 이날 기념식에 광주에서 한가락 한다는 선출직 인사는 한 분(?)도 참석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광주시장,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등 그 많은 뉴스의 인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딱 한 사람, 비록 현역 선출직 인사는 아니지만 장희국 전 광주시교육감이 참석, 기념사를 남겨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말 의병운동은 우리 호남인의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될, 잊을 수도 없는 호남정신사의 거대한 산맥이다”며 퇴색해가는 세인의 의식에 일침을 놓았다.

이날 특강에 나선 홍영기 한국학호남원장은 어등산 일대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죽봉 김태원(본명은 김 준) 장군의 항일 투쟁정신을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를 좇는다)라고 정의하고 그가 남긴 글을 소개했다. 형제 의병이었던 아우 김 율에게 남긴이다.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 백성을 구하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라네. 전쟁은 죽어야 하는 것이니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1908년 음력 2월 19일 형 준 쓰다”

새삼 비장함이 느껴진다. 죽음 앞에 어떤 사치스런 문구도, 어떤 가식도 없이 당당한 본심을 동생에게 전하고 있다. 

일제는 김태원 장군을 거괴(巨魁:도둑의 최고 두목)으로 지칭하고 김태원과 김율 의병부대를 잡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시킨다. 그 와중에 동생 김율이 1908년 3월 29일 붙잡혀 먼저 광주감옥에 수감되고 알마 뒤 형 태원도 일제가 쳐 놓은 밀정의 제보로 발각돼 집중 사격을 받고 사살당한다. 이 때가 1908년 4월 25일, 서른아홉의 나이였다. 다음날 일제는 동생으로하여금 형의 시신을 확인케하고 동생마저 총살한다.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이같은 항일의병사를 김태원 장군의 손자인 김갑제씨(현 호남한말의병기념사업후원회장)가 일깨워 주고 있어 다행이다.

이날 기념식장에는 학생들이 충의격문을 낭독했는데 잊을 수 없는 또 한사람의 인물 전해산 의병장의 글이 소개돼 장내를 숙연케했다.

“아! 천하의 대의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만 빠져도 사람이 사람되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되지 못한다. 왜 대의는 세 가지가 있다 하는가, 우리의 땅은 한 치라도 남에게 주어서는 안되고 우리 백성은 한 명이라도 오랑케가 돼서는 안되고, 우리 숭상한 도학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죽음을 불사하고 강토와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전해산 의병장의 고뇌와 심사를 일깨워 준다. 전해산 의병장은 1909년 10월 광주 임곡에서 체포돼 다음해 7월 18일 대구에서 32세의 나이에 사형당했다. 

그는 순국 전 최후 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그분들은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는데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또다시 일제에 아부하고 일제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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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붕 2024-10-30 10:05:05
호남한말의병기념사업회 !
젖ㅇ치관변단체가 아니고, 이런 단체를 지원해야지. ㅉ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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