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1주년…더디지만 진실을 향해, 남겨진 과제는
상태바
5·18 41주년…더디지만 진실을 향해, 남겨진 과제는
  • /뉴시스
  • 승인 2021.05.17 1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집단발포 명령 전모 밝히고 발포 명령자 찾아내야
사격·발포 지시와 관련된 군 관계자들 증언 삭제
군 자료 위·변조 수두룩…핵심 자료 일괄 폐기도
5·18조사위, 빅데이터 활용 발포 책임 소재 규명
공수부대 계엄군이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시민군 진압 작전을 마치고 도청 앞에 집결하고 있다.                /한국일보 제공
공수부대 계엄군이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시민군 진압 작전을 마치고 도청 앞에 집결하고 있다. /한국일보 제공

 

[광주타임즈]5·18민주화운동의 완전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뚜렷하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를 밝히고,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5·18광주청문회, 1995년 12·12 및 5·18 검찰 수사, 1997년 대법원 판결,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기록을 재검토하며 조사를 이어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발포 명령자를 정확히 밝힐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발포 관련 증거를 없애거나 왜곡해 그동안 정부 차원 조사(9차례)에 한계를 초래했고, 과거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도 진압 작전 책임자들의 혐의 입증에만 집중됐기 때문이다.

신군부 세력은 1985~1998년 80위원회, 511연구위원회, 80육군대책위원회, 511분석반 등 각종 군·정보기관 비밀조직을 꾸려 증거 인멸과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주도했다.

사격·발포 지시와 관련된 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삭제시키거나 전투 상보·상황일지를 비롯한 5·18 관련 군 자료도 위·변조한 게 수두룩하다. 민간인 사살 기록이나 사망자 수를 수정하는 방식 등을 통해서다.

1988년 11월부터 1989년 2월24일까지 진행된 5·18광주청문회도 증언자들을 상대로 답변 내용·표정·태도까지 연습시킨 511위원회의 각본대로 이뤄졌다. 신군부 세력은 보안사 차원에서 1993년과 1996년 5·18의 진상을 감추기 위해 핵심 자료를 일괄 폐기하기도 했다.

5·18 핵심 자료 폐기·조작은 고스란히 실체 규명의 한계로 이어졌다. 1995년 검찰은 청문회에서 불거진 쟁점과 조작된 자료·증언을 바탕으로 5·18 무력진압 가해자들의 혐의 입증에만 주력했다.

전두환 중심의 비공식 지휘체계에서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는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수사·기소도 없었다. 구체적인 피해 내용(조준 사격 증언 등)과 증거에 대한 수사 역시 미흡하기 짝이 없다.

결국 ‘성공한 군사 정변은 처벌할 수 없다’며 면죄부만 주어졌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에게 적용된 내란 목적 살인 행위는 1980년 5월 27일 옛 전남도청 진압 작전 과정에 숨진 17명뿐이었다. 1980년 5월 20~21일 광주역·전남도청에서 자행된 집단발포와 여러 차례의 양민 학살에 대해서는 처벌받지 않았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가 발굴한 보안사의 군 작전 문서 대부분도 조작돼 있었다. 발포 등 핵심 쟁점과 관련한 자료들은 폐기되거나 통째로 누락된 상태였다.

아울러 계엄·보안사는 5·18 직후 발표문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책임을 덧씌우며 발포 자체를 부정했다. 전두환이 자위권 결정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꾸며왔고 작전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현지 사령관에게 위임했다며 책임을 회피해왔다.

반면 5·18연구진은 “신군부 세력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지휘 체계로 광주를 ‘조기 강경 진압’하면서 폭력을 수반했고, 발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자위권 발동 이전 실탄 지급과 수차례 발포 ▲자위권 발동수칙인 하복부 사격 미준수(5·18 총상환자 53% 이상이 머리·목·가슴 등 파편, 무장 전인 21일 이전 부상) ▲저격수 배치, 가정집과 비무장·구호 조치 시민에게 사격, 기관총 사격 등이 대표적인 근거다.

보안사 일일속보철(1980년 5월 21일)에 명시된 ‘23:15 전교사 및 전남대 주둔 병력에 실탄 장전 및 유사 시 발포명령 하달(1인당 20발)’과 육군 제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적힌 ‘전(全) 각하(閣下) : 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란 내용도 사실상 전두환씨가 발포 지시를 내린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5·18조사위가 최근 1년 동안 조사에서 신군부의 명령으로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장·사병들로부터 기관총 배치·저격수의 조준 사격, 암매장과 관련된 유의미한 진술을 확보한 만큼 발포 명령 경위와 사망·행방불명자 수 등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16일 “발포 명령자 규명이 쉽지 않은 이유는 전두환이 권좌에 있는 동안 불리한 증거들을 없앴기 때문이다. 조작된 군 문서 탓에 조사에 한계가 많고, 4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각종 증언을 교차 검증하기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간인 집단학살·암매장과 관련한 의혹들은 결국 발포명령과 직결된다. 정권찬탈을 위해 별도 지휘체계로부터 발포 명령이 이뤄졌다는 것을 세밀하게 규명해야 하고, 지휘체계 이원화를 밝혀야 정확한 발포 계통과 책임자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5·18조사위는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끝까지 발포와 관련된 증언을 하지 않을 경우 빅데이터를 활용해 발포 책임 소재를 규명할 방침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