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바탕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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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바탕 꿈이다
  • 광주타임즈
  • 승인 2014.07.2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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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 논설위원 최수호 = 누구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도저히 못 이겨낼 것 같았던 고통의 시절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고통의 시련은 마치 아득한 꿈처럼 회상될 뿐 더 이상 현실은 아님을 곧바로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현실이라 굳게 믿고 있는 지금의 고통 역시 언젠가는 “견뎌내기 어려운 꿈을 꾸었구나.”라고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살이에 찌들대로 찌든 사람은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주적 무한의 시간에서 바라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현존하다가 꿈처럼 사라지는 한시적인 허상의 존재들일 뿐이며, 우리 자신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꿈처럼 떠나야 한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젊은이의 눈에는 끝없이 긴 미래로 보이며, 늙은이의 눈에는 지극히 짧은 과거로 보인다. 그러므로 인생이 지극히 짧다는 사실을 알려면 장수한 늙은이가 되어보라.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꿈과 같이 덧없게 느껴지고, 허무와 무상이 뚜렷이 눈에 보이고 마음에 스며들게 된다.”고 말했다.

옛 선현들 역시도 “인생은 한 바탕 꿈이다.”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을 감으면 시간의 한계가 싹 사라지면서 과거의 어린 시절도 현재로, 현재의 고달픔도 미래의 행복으로, 공간의 한계도 온전히 사라지면서 달의 표면에 사뿐히 내리는 존재가 ‘나’ 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눈을 감았을 때 느낄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세계의 현실은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지면서 오감이 한계 짓고 인지하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감이 인식한 꿈에 갇혀 있는 것만이 바로 유일한 현실로 돌아온다.

따라서 시공의 한계가 존재하는 오감의 영역인 물질세계에선 모든 것들은 생생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눈을 감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는 ‘나’가 진짜인가? 눈을 뜨고 시공에 갇힌 유한한 세계를 인식해내는 ‘나’가 진짜인가?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일 뿐이지 우리가 실제 사는 환경은 아니다. 현실은 시각적 착각이다.”이라 했다.

이제 우리는 ‘인생은 꿈’이라는 사실과 육신도 꿈처럼 사라진다는 진실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인생이란 한바탕의 꿈인 줄 알았다면 권력, 명예, 물질적 풍요를 과시하는 것은 꿈속의 허상을 사실인양 착각하고 허세를 부리는 짓에 불과하며, 삶이 진짜 현실인 줄 믿고 집착하여 아옹다옹 모든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성찰하는 지혜로운 인생을 엮어가라.

시공을 벗어난 진짜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공이 존재하는 가짜 세계에서 만들어낸 욕망의 대상인 부, 명예, 권력, 물질적 소유욕과 같은 꿈속의 허상은 텅 비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에 대한 지나친 욕망에서 저절로 벗어나게 되고, 고통과 집착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오감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은 우주를 왜곡되고 부정확한 허상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억울한 일들로 어쩔 수 없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 영혼이 천국을 벗어나 지구에 내려올 때는 지구라는 연극무대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합의했으며, 완벽하지 못한 지구상에 태어나는 순간 어떤 배역이든 맡아 열심히 연기하기로 우주와 계약을 맺었음을 알아야 한다.

얼핏 보면 매우 부당한 계약 같지만 연극은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 육신의 옷을 입고 지구상에 태어나는 것은 온갖 험난한 경험을 통해 느끼고 깨달아서 완성된 자아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연기를 잘 했다고 여겨지면 완벽한 천국에서 영원히 평화를 누리지만 연기를 망쳤다고 여겨지면 다시 새로운 배역을 받아 연극무대에 다시 서야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으며, 우주는 허투루 시키는 연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불필요한 근심 걱정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고통스런 연기를 시키는 것은 인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연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의 깊이가 깊을수록 영적 성장의 깊이도 깊을 것이다.

이처럼 고통은 내가 맡은 배역이므로 고통을 피하는 것은 곧 인생의 배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고통의 목적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고통의 배역을 거부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짓이며, 바로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못 견디게 쓰라린 고통의 아픔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역경도 견뎌낼 수가 있다”고 했듯이 고통의 배역을 받아들이는 순간 괴로움은 기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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