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환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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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환상들
  • 광주타임즈
  • 승인 2013.07.2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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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 논설위원 최수호 = 우리는 어린 시절에 바른 생각을 하며 정의롭고 선하고 진지하게 열심히 살면 행복을 누리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배웠다.

그리고 고즈넉한 풀밭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평화로이 바라보면서 나도 남들처럼 그렇게 살리라고 다짐했고 그럴 수 있으리라 나와 세상을 믿었다.

그런데 중년을 넘어선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세상은 정의롭고 선하고 진지한 자들의 몫이 아니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권위가 무너져버린 한심스런 오늘의 내 모습을 지켜보면 세상은 속이는 자들, 뻔질대는 자들, 이간질하는 자들, 패거리를 좋아하는 자들, 출세 지향적인 자들, 감투 좋아하는 자들, 강한 것에 약하고 약한 것에 강했던 기회주의자들, 남의 노력을 가로채는 얌체 자들, 세태에 편승하는 얍삽한 자들, 실리를 부추기는 선동자들, 떠벌이며 나서는 허영꾼들, 힘을 과시하며 위세부리는 권력 지향형들, 남의 것으로 세상을 농간한 불량배들의 것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세상에 속았다고 분노하는 마음에 ‘나’의 눈초리가 맞추어진다. 그리고 나의 존엄성이 짓밟혀버린 처량한 ‘나’를 되새겨보면 볼수록 나를 속인 세상, 나를 배신한 세상, 멍청한 자신에 대한 울분에 치를 떨게 한다.

그래서 이미 허망하게 지나간 젊은 날들이 억울해서 복수하고 싶다. 하지만 막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좌절감과 무력감만이 밀려올 뿐이다. 그러니 신세 한탄만 하는 지경이 되고 만다.

그런 와중에도 젊음을 되찾은 ‘나’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리고는 순진하게 세상에 속지 않는 ‘나’, 세상이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하지 않는 ‘나’, 지난날처럼 멍청하지 않은 ‘나’,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감행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나’, 세상에 통렬하게 맞닥뜨린 제멋대로인 ‘나’, 과거에 잃어버린 것들을 완전히 되찾은 ‘나’를 복원해 낸다.

수백 번 머릿속에서만 그렸던 ‘영웅적인 나의 모습’ 말이다. 즉 지금까지 내게는 없었던 당돌한 자신감, 세상의 비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발칙함, 당당한 무례함으로 잃어버린 나의 권위를 되찾은 ‘나’, 용기와 박력이 넘쳐나는 ‘나’. 이렇게 잃어버린 ‘나’를 되찾았으니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권력으로 날 비웃는 세상, 날 무시했던 자들에게 구원해달라고 애걸복걸하도록 복수할 것 같았다.

뺀질이들이 나를 질식시켰던 비열한 방식 그대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참된 ‘나’를 복원했으니 나는 이 개판인 세상을 더 이상 순진하게 살지 않겠다고, 더 이상 속고 당하지 않겠다고, 나도 너희들처럼 학대하고 유린해 주겠다고, 이제는 더 이상 주눅 든 ‘나’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 했다. 고개를 치켜들고 현실의 ‘나’를 올바로 자각하기 직전까지는 이제 난 이런 ‘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리를 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연약한 내면의 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아름다움이 밀려오는 환희를 맛보게 된다. 그랬구나! 발칙하고 당돌했던 ‘나’는 없었구나! 내 구원의 여신은 오직 겁 많고, 여리고, 사랑받고 싶지만 자신 없고, 특별해지고 싶지만 평범하고, 평범해서 아름다운 걸 모르고, 평범하면 큰일 날줄 알고 아등바등 대던 그냥 그런 세상 사람일 뿐이었구나! 아픈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난 척, 아는 척, 강한 척 버둥거리면서 안간힘을 써대던 의젓하고 초연한 내습도 모두 허상이었구나! 그리고 세상도 내 아내도 아니 세상 사람들 모두다 나처럼 억울하고, 분하고, 지치고, 혼란스러워 무언가를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 모두는 나처럼 한때는 순수하고, 행복을 그리워했지만 어느 땐가 복수를 다짐하고 잃어버린 성공에 허탈해했을 것이다. 어수룩하게 세상에 속고, 속은 것이 창피하고 분해서 세상에 화살을 돌렸던 어리석은 ‘나’를 이젠 알 것 같구나.

바보처럼 세상이 그런 거라는 걸 왜 잘 몰랐냐고 서로 비아냥거리고, 멍청하게 속았다는 걸 들킬까봐, 놀림감이 될까봐, 행여 얕보일까봐 가슴속에 한의 응어리를 안고 센 척, 아는 척, 사나운 척, 속지 않은 척, 이미 다 알고 있는 척 허세를 부리는데 전전긍긍했던 우리들의 세상을 이젠 알 것 같다.

그러니 내가 되찾았던 ‘나’는 ‘참 나’가 아니라 또 다른 가면을 하나 더 덧씌운 허상의 나였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알 수 없는 그런 거였다. 우린 어리석고 무력해서 잘 속고 분노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창피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날 멍청이라고 한심하다고 경멸할 것도 없다. 인간이란 그런 거 그래서 그렇게 사는 거 어쩌겠는가! 서로 증오하고 넌덜머리를 내겠지만 그래도 이제 난 마음이 따뜻해지는 슬픔을 안고 아름다운 새 아침을 맞이할 거야.

그리곤 변하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만 이루어내는 화려한 내 삶의 끝을 맞이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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