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힌 진실 어디에…암매장 행불자 규명 왜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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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힌 진실 어디에…암매장 행불자 규명 왜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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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0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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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4주년 ‘중’]
암매장 유해·행불자와 일치, 기정사실로
꾸준한 후속 발굴에도 가시적 성과는 답보
증언 의존 한계…지형 변화·기록 은폐 난관
지난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해남군 해남읍 백야리 예비군훈련장 주변 담장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해남군 해남읍 백야리 예비군훈련장 주변 담장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뉴시스

[광주타임즈] 5·18민주화운동 직후 의혹만 무성했던 행방불명자 암매장은 5·18단체 중심의 발굴 조사·유전자 대조 등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도 주요 진상규명 과제로 삼고, 최대 178명에 이르는 행불자 유해를 찾고자 암매장 추정지 발굴 등에 힘썼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조사 방식 자체가 증언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실제 발굴에서도 그간 지형적 변화가 커 한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항쟁 직후 군이 작전문서 등을 조직적 폐기·은폐한 탓에 문헌 조사에서도 ‘진실 퍼즐’을 찾을 수 없었다.

■ ‘사실이었다’ 암매장 유해 신원은 행불자

8일 5·18조사위에 따르면, 5·18 항쟁 희생자 암매장에 대한 제보와 현장 조사는 1988년 국회 청문회를 계기로 본격화됐다.

5·18단체와 유족들이 앞장섰고, 당시 평화민주당 광주시당도 현지조사팀을 꾸려 실체 파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광주 동구 부엉산 자락에 묻혀있던 유해 1구가 발견됐다.

2002년에는 망월동 5·18 옛 묘역 무명열사 묘소 등지에서 발굴된 유해 총 24구의 유전자 정보를 행불자 가족과 대조, 이 중 6구가 행불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에는 5·18기념재단이 자체적으로 제보 창구를 운영하며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너릿재·광주천변·광주교도소 터 등 암매장 유력지 25곳을 조사해 유해를 발견했지만, 행불자 유전자 정보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5·18조사위는 5·18재단 측으로부터 암매장 관련 제보 내용 등을 넘겨받아 최근까지 조사를 이어왔다.

■ 미궁 빠진 암매장 행불자 유해 찾기

5·18조사위는 지난 4년간 암매장과 연관성이 있는 계엄군들을 5·18재단이 넘긴 자료와 대조, 희생자 유해 매장을 지시·실행했거나 보거나 들은 경험이 있는 핵심 증언자 57명을 추려냈다.

이후 핵심 증언자 진술을 토대로 옛 광주교도소 지하 곳곳을 팠지만 유해 매장 등 흔적은 찾지 못했다.

교도소와 가까운 각화동 광주화물터미널 주변 야산에서는 1980년 전후 숨진 것으로 추정된 20대 여성 유해 1구가 발견됐으나 행불자 가족 유전자와 일치하지 않았다.

지난 2022년 10월 광주교도소 내 솔로몬로파크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무연고 유해 261구도 행불자 가족과 일치하지 않았다. 발견 유해 중 1구가 행불자 염모씨와 염색체 서열과 비슷해 기대를 모았지만, 최종 검사 결과 불일치로 판명됐다.

다만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5·18조사위는 유전자 추가 대조를 통해 민주묘지 무명열사 묘역 내 안장 유해 5기 중 3기가 행방불명자인 고(故) 김재영군과 김광복군, 불인정 행불자 고 신동남씨인 것으로 확인했다.

5·18조사위는 항쟁 관련성 등을 따져볼 때 행방불명자는 총 178명(인정자 73명·불인정자 105명)으로 잠정 산정했다.

■ 조사 한계는 없었나…‘제3의 장소’ 어디?

행불자 암매장에 진척이 없는 것은 조사 과정상 한계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다.

5·18조사위는 교차 검증으로 신빙성이 인정되는 계엄군의 핵심 증언을 토대로 암매장 유해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나 찾아간 암매장 유력 추정지 주변 지형지물은 크게 변했다.

땅 위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등 지질 변화 폭이 커 매장 흔적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례도 많았다는 것이 5·18조사위 설명이다.

5·18조사위는 행불자 유해의 사후 수습 또는 처리, 즉 최초 매장지에서 ‘제3의 장소’로 옮겨졌거나 가매장 이후 재처리됐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 특히 ‘가매장 후 보고하라’는 헌병대 지시가 적힌 상황일지를 비롯한 여러 정황과 진술이 있었다.

실제 조사 과정에서 20사단 사병들은 “(교도소 내) 가매장했던 시신을 수습해 이튿날 트럭에 싣고 이동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지만, 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암매장한 유해를 추가 처리했거나 옮긴 경과 등이 자세히 담긴 군 관련 문건을 확보하지 못했다. 군의 조직적인 항쟁 전후 문서 자료 폐기·은폐에 따른 영향으로 풀이된다.

끝내 행불자 암매장 실체 규명과 함께 유해의 사후 수습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과제가 또 다시 남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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