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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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허구
  • 광주타임즈
  • 승인 2014.11.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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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논설위원 최수호 기자=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과 현실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후회하고 사과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상대의 태도가 뭔가 언짢다고 여겨지면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려고 불쑥 화를 낸다.

그러면 한순간에 서로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면서 썰렁한 분위기가 되고 만다. 이럴 때 상대의 현실적 진의를 정확히 듣고 상대의 억울한 입장을 명확히 파악하게 되면 경솔한 자신을 후회하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이렇게 되면 긴장 상태였던 ‘너와 나’가 반전되면서 정상적인 ‘우리’로 되돌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지금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과 신이 뒤엉켜 사랑과 증오를 다투고, 마늘을 먹은 곰이 사람이 되고, 순식간에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개기일식을 신의 조화라 여기던 허황된 생각들을 실제로 믿는 경험을 하면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의식수준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하거나, 끔찍한 일을 목격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로 만들어낸 믿음은 진정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신비한 일들을 경험해야했던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들은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생성해낸 마음을 현실적 진실로 착각하여 늘 오류를 범하는 체험을 해야만 하는 속성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인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이성적이고 상대는 비이성적이라며 자신에게 위협적인 상대를 탓하거나 교정하려고 한다.

그리곤 곧바로 자신 또한 상대로부터 탓을 들어야만 하고 교화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는 환경에 따른 뇌의 놀라운 적응력 덕분에 매우 다른 모습으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삶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옛날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를 가르는 기준 자체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즉 ‘우리’라는 집단의식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 당시의 평균의식에서 얼마나 멀어져있는가에 의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는 ‘우리’가 될 수 없고 수없이 많은 것들을 배워 익혀야 한다. 이를테면 어른을 공경하고, 남을 편하게 하고, 행사장에는 정장을 해야 하고, 장례식에 빨간 복장은 안 되고, 불에 손을 대서는 안 되고, 줄을 서는 질서의식을 가져야 하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되고, 마구 화풀이를 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 남을 존중하면서도 나를 챙기는 법 등등 자신이 살고 있는 집단 내에서 무리 없이 적응하며 살아가는 기능들을 무수히 배워야 ‘우리’가 된다는 것이다.

환경이 ‘우리’를 만들지만 ‘우리’ 역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글과 지식을 배워 ‘우리’가 되는 길을 익혀간다. 특히 언어는 책상, 책, 연필처럼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새의 울음소리, 물 흐르는 소리, 인간의 목소리처럼 무엇을 듣고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정(情), 한(恨), 애착(愛着), 원한(怨恨)처럼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무의식의 중요성, 시간의 소중함, 의젓한 인격처럼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우리’란 똑같이 가르쳐지고 동일하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형성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식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체험을 받아들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존재이어야 한다는 본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서로 공감하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 것이 바람직한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정해진 ‘우리’에 대한 집착은 비생산적인 논쟁의 논리일 뿐이다. 단지 한 인간으로서 주어진 현실에 잘 적응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진정한 ‘우리’가 된다. 그렇지만 현실에는 분명히 수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어가야 한다. 다만 구체적인 한사람의 문제일 때는 어떻게 살라고 강요하지도 말고, 어떤 삶이 바르다고 말하지도 말고, 오직 왜 그렇게 사는 가를 묻고 지금의 삶에서 모순과 갈등을 깨닫고 편한 삶을 찾아가게 하라. “어떤 식으로 왜 바꾸려고 하는 가?”라고 묻고 그 동기를 깨닫게만 하라.

세상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세상을 증오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니 ‘나인 우리’로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려면 ‘나’와 ‘우리’를 사수하려고 적개심에 따른 화풀이가 되지 않도록 하라. ‘나’는 왜 무얼 지키려고 하는지, 무얼 왜 바꾸려고 하는 지만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변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배려하는 사회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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