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석 시인]4.19후 이승만 하야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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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석 시인]4.19후 이승만 하야의 교훈
  • 광주타임즈
  • 승인 2017.01.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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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광주타임즈]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변했을 것이다. B.파스칼의 말이다.

한데 조선시대 명성황후는 코와는 상관없이 비극의 역사를 남기고 있고, 최근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은 얼굴 성형때문인지, 최순실 국정농단 때문인지 탄핵정국에 빠져있다.

역사는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지 않는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도 인종차별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독일의 히틀러가 자유주의 국가의 선구인 미국에서 재현된 샘이다.

독일에서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후 독일은 히틀러 파시즘의 뼈저린 교훈으로 반파시즘 정치교육과 반파시즘에 대한 좌우파 연대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더니 현직 대통령의 퇴진 문제로 정국의 향방은 탄핵정국 속 오리무중이다.

이 와중에 한 유력한 대선주자와 일부 언론에서는 이승만의 하야를 언급했다. 그의 하야가 현 정국에 주는 교훈을 반추해 보자.

이승만 하야의 단서는 1960년 3015부정선거였고, 결정적인 계기는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 시민의 항의시위에 대한 발포가 자행된 4.19혁명이었다. 발포로 인한 희생자는 부상 172명과 사망 21명에 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혁명을 수습하기 위한 거국내각의 구성을 위해 4월25일 야당인 민주당 구파의 최고위원인 허정을 수석국무위원인 외무장관으로 기용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과 달리 정치학 박사인 이승만은 최소한 거국내각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무장관 직무대행 최규하는 타고난 권한대행의 팔자였는지 10.26사태 이후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당시 헌법에는 국무총리제가 없었고 부통령제가 있었지만 민주당 신파의 장면 부통령은 4월22일 사임했다. 만약 장 부통령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의 하야 이후 과도내각 수반은 허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석국무위원을 맡은 허정은 국방부 장관 김정렬과 함께 이승만의 하야를 권고하여 관찰시켰다. 이승만의 의도는 허정 내각을 방탄내각으로 삼아 정국을 수습하려 했지만 조야(朝野)의 하야압박을 견딜수 가 없었다.

이승만의 하야 이후 국회는 4월27일 여·야 합의하에 허정 과도정부를 출범시켰고, 과도정부하에 6·15개헌을 통해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이 과도정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은 ‘혁명적 상황’을 수습했다고 보지만, 비판적인 입장은 보수주의 세력의 권력이 연장되어 4·19가 미완성의 시민혁명이 되었다고 해석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29일 국회가 결정하여 (대통령직 임기단축을 포함한)안정적인 정권이양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면 퇴진하겠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임박한 탄핵발의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이른바 정치 원로와 친박계 중진의 명예퇴진론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담화의 핵심은 탄핵안 가결도 국회 결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고 다른 결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야권은 즉각 담화를 탄핵 교란으로 평가절하했지만, 교란책의 효과는 예측불허였다. 비박계의 탄핵찬성과 전부는 아니라했는데, 친박계까지 이탈할 조짐을 보이더니 실지 이탈을 했고 탄핵안이 가결 됐다. 함에도 국민이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는 시한을 종잡을 수 없는 탄핵도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는 ‘명예로운 또는 질서 있는 퇴진’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국민은 이제 촛불시위의 대상을 박근혜 뿐만이 아니라 정권과 국회로 확대할 것이다.

4.19가 미완의 시민혁명으로 마무리된 것은 피는 시민이 흘리고 혁명의 과실은 자유당의 반대당인 신·구파가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세계가 놀란 위대한 국민의 촛불시위는 그런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이 국민의 촛불시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허정의 고언을 되새겨야 한다.

허정은 그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나는 정치가로서 가장 비열한 사람은 국가가 난국에 놓였을 때 이를 이용하여 집권을 도모하는 자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여권이든 야권이든 대선주자들이 촛불시위를 득표의 손익계산이라는 관점으로 대응하는 한, 권위주위와 민주화 세력간의 타협인 1987년 체제는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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