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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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6)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3.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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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 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경주=정권이 무능하거나 부패한 것은 국민이 똑똑치 못한 투표한 탓이다.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 답변 (요약) 정리해 보면 1) 도참설 인용: 왕건의 훈요 10조 중에 8조의 도참(圖讖) 참위(讖緯)설은 그의 가족에게 은밀히 전한 것이라서 사실로 믿고 있다. 2) 배역지세의 잘못된 근거인용: 금강 수계 일부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어 산이 개성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으므로 배역의 땅이다. 3) 몽골군이 차령(車嶺)을 통과했으며 그 곳이 차현(車峴)이다.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23년 8월 기사에는 “몽고군 100여 인이 온수군(溫水郡)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차현(車峴)으로 나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이 공주군에 있는 차령(車嶺)이며 곧, 차현(車峴)이라는 증거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7 충청도 공주목 기사에 車峴(차현)이 ‘공주’목 57리에 있다. 라” 되어있어 차령이 차현이란 증거다.

금강 발원지는 배역지세가 될 수 없다. 3-1)항: 가족에게 은밀히 전한 유언이다. (동의함) 3-2)항: 금강의 역수가 배역지세다. (동의하지 않음) 錦江(금강)은 전북 장수읍 신무산리 수분이 마을 뜬 봉 샘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흘러 충북 옥천군 까지 거슬러 가다가 방향을 틀어 서남쪽으로 되돌아 흘러 내려간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즉, 금강의 물길이 개경을 향하여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산은 남쪽을 바라보아, 개경으로부터 뒤돌아, 서있을 것이란 전제로 배역지세라고 본 것 같다, 그러나, 산형은 물길이 흐르는 쪽으로 토사가 깎여나가 물이 흐르는 북쪽(개경)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개경으로부터 背域地勢(배역지세)가 아니라, 順逆地勢(순역지세)로서 마치 신하들이 왕건 앞에 머리를 숙이는 형상이므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주장은 잘못된 해석이다.

1990년경 전북 장수읍 신무산리 수분이 고개에 있던 김세호라는 분의 집 남쪽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은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금강의 발원수가 된다고 했다. 그렇게 엇갈린 물길은 전북 장수군에서 북쪽인 충청북도 까지 거슬러 흐르는데 바로 이 부분을 배역지세로 해석하고 있으나, 흐르는 물길 따라 산형의 고개가 숙이게 마련이며 이는 자연 과학의 상식이다. 신편 한국사 기록을 인정하더라도 배역지세는 충북 옥천군에서 전북 장수군까지만 해당하며 굳이 공주강 이하를 배역지세로 본다면 부산까지도 배역지세가 될 수 있으며 딱히 호남(湖南)만을 배역의 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왜곡이 심한 억지해석으로 여겨진다.

금강은 일본 침략시기에 비로소 한 줄기의 강으로 인정되었다.

금강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전체 수계를 단일 물길로 보기 시작했으며 충북의 미호천(彌串川)’을 금강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했었지만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거창군을 품에 안고 경상, 전라, 충청의 경계라는 삼도봉(三道峰)을 거쳐 덕유산을 지난 금남 호남 정맥이 되어 금강의 발원지인 ‘수분리’가 있는 신무산리의 ‘뜬 봉 샘’이 금강의 진짜 발원지이다. 비단 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금강은 우리나라 안에서 여섯 번째로 길고, 남한에서는 낙동강과 한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길며, 총 유역 면적만 해도 9,886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당서(당서)에서도 웅진강(熊津江)으로 기록했으며 금강은 곰의 寫音(사음)이라고 주장했지만. 필자는 이 또한 잘못된 문헌으로 보며 錦(비단금)자는 금강 유역 사람들이 길쌈을 위해 금강 주변에서, ‘모시’를 삶아 껍질을 벗기는 등 비단을 만드는 특성화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웅진강’의 명칭으로 공주 지역을 흐를 때만이 곰을 상징했다.

緋緞(비단)은 붉은 명주 등 환상적인 옷감을 의미하여 우리말 비단이 서양으로 건너가서 Fabric(패브릭)으로 번역했으며 그 의미는 길쌈, 즉 견직, 모시, 명주, 삼베, 등을 말하고 Silk(실크)는 우리말 ‘실’ 그대로이며 K는 고려의 Initial(이니셜)이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불렸던 금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의 발원지가 “수분현의 남쪽 25리에 있다.”라고 기록했다. 이렇듯 금강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많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즉, 상류에서부터 赤登津江, 車灘江, 化仁津江, 末訖灘江, 荊角津江, 熊津江, 白馬江, 古城津강, 등등으로 불러졌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더듬어 봐도 고려초기까지엔 公州江(공주강)이라고 불러진 적은 없었다.1) 왕건 시대엔 熊津江(웅진강)이었다.

위 기록을 살펴 본바와 같이 삼국 시대부터 왕건 치세까지 금강이라는 명칭은 발견할 수 없으며 ‘대동여지도’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공주 지역의 한 고지도에 公州(공주) 錦江(금강)이 함께 표기되었고, 그 옆으로 熊津(웅진) 이라고 별도 표기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근세에 작성된 지도를 마치 왕건 시대의 지도인 것처럼 포스팅(Posting)하여 훈요 8조가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혼란을 주기 위해 인용되는 자료들이 떠도는 것으로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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