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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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22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7.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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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 경 주=특히 호남 일부 계층의 사람들은 김대중 선생에 대하여 타 지역의 모략에 버금가는 악감정을 가진 분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에 조력 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반대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어떤 욕심을 채우기 위해 김대중 선생을 이용하려다가 발탁되지 못한 원한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와 같은 유추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악의적인 聲討(성토)성 비난을 통해 미루어 짐작 할 만 한 논리들이 세상에 떠돌기 때문이다.

만약에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 만들어 박정희처럼 그의 고향에 국가 예산을 퍼부어 대박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박정희를 비난할 정당성도 자격도 없는 또 하나의 올곧은 積弊思想(적폐사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우리 모두가 격멸하고 추방해야할 목적격인 새 시대의 Paradigm(패러다임)이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배를 불리기 위해 상대 지역의 불이익을 전제로 하는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것은 사회 정의 구현 차원도 아니며 떳떳치 못한 추한 욕심의 발로로서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본다면 호남의 위상을 높이고 이 땅에 정의를 확립하려는 바른 정치를 실행 하고자 했던 유일한 호남인 대통령이었다.

그분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세계가 인정한 위대한 지도자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배출한 호남의 주역들이 인생 말년에 정치 도의와 도덕적 가치를 배신하고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사리사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추한 꼴을 보인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에 한ㅎ갑, 한ㄱ옥, 김ㄱ재, 박ㅈ원 등등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대통령을 탄생시킨 후예들로서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정치적 추태를 보인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호남에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깊이 새겨 볼일이다.

호남이 차별 당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도대체 호남 차별의 본질은 무엇이며 호남인들이 특별히 나쁘다는 통계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호남인들이 특별히 좋지 않다는 근거로 인구 비례에 의하여 범죄율이 높다는 등의 공인된 분석 자료를 본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인이 비난받는 사례들은 분명히 있었으며 차별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이유 중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뒤통수를 잘 친다거나, 뒤끝이 좋지 않다. 오기가 많다. 반드시 손해를 끼친다. 등등인 것 같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혹시 유전적 혈통의 문제일까? 먼저 씨족 분포를 대략적으로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라도의 성씨로 대표 되는 전주이씨가 있고 남평 문씨, 나주 금성 나씨, 압해 정씨가 있기는 하지만 압해 정씨의 시조 정덕성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으며, 선종(宣宗) 때 군국사(軍國事)로 바른말을 간언하다 서기 1100년경에 전라남도 나주 목의 압해도(押海島)에 유배(流配)되어 왔다. 그 후에 사면되었으나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한국 정씨(丁氏)의 시조가 되었다. 압해 정씨는 후대에 나주 정씨, 영광 정씨, 의성 정씨, 창원 정씨로 분관되었으나 모두 같은 뿌리를 두고 있어 다시 압해 정씨로 통합되어 부르기도 한다. 인물로는 정극인(丁克仁)[1401~1481], 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이 있다.

아마도 그 밖에 정씨들은 경주 정씨에서 갈라진 세계(世系)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경주 정씨의 시조는 B.C 32년에 탄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반해 다른 정씨들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면 경주 정씨의 이탈 분파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평산 신씨는 전라도 성씨로 봐야한다. 평산 신씨는 본래가 전남 곡성 신씨였으나, 왕건과 의형제를 맺었던 유금필 복지겸 신숭겸 등이 어느 날 황해도 평산 들녘으로 사냥을 나갔다는 것이다.

때 마침 기러기들이 빈 논밭에 내려앉아서 낮 곡식 먹이를 고르다가 왕건 의형제들이 다가오는데 위협을 느꼈던지...떼 지어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왕건은 장난삼아 누구이던 활을 쏴서 저~기러기를 잡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신숭겸이 활을 치켜들며 ‘몇 번째 날아가는 기러기 어디를 맞출까요?’라고 묻기에 왕건은 시답지 않다고 여겨 세 번째 나는 기러기 오른쪽 날개를 맞춰 보라고 했는데 신숭겸 장군은 ‘네 알겠습니다. 와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으며 세 번째 날아가던 기러기는 별안간 오른쪽 날개를 늘어트리며 왼쪽 날개만 퍼덕이다가 들녘으로 떨어져 곤 두박 치더라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왕건은 신숭겸 장군의 활 솜씨에 감탄하여 평산 들녘의 땅을 신숭겸 장군에게 하사하면서 평산에 눌러 살게 되었고 그 당시의 관아의 병적부에 가름하는 기록에 의해 본향이 정해짐으로 전라남도 곡성 신씨가 졸지에 황해도 평산 신씨로 바뀐 것이다. 어쨌든 신숭겸 장군은 전라도에 조상의 뿌리를 둔 성씨로서 훗날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견훤의 백제 군대에게 포위당해 죽을 고비에 처하자, 자신의 갑옷을 벗어서 왕건에게 주고 왕건의 대장군 복장으로 바꿔 입은 다음 신숭겸 장군이 왕건 행세를 하면서 앞으로 달려 나아가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며 싸우다가 목이 잘려 전사했지만 신숭겸 장군 덕분에 왕건은 무사히 탈출하여 고려의 종묘사직을 지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왕건의 의형제들은 훗날에도 함께 모여 술자리를 할 때에는 목이 없는 신숭겸 장군의 형상을 짚으로 만들어 술자리에 함께 모시고 술을 따라 건네며 신 장군에 의리와 용맹을 기억했으며 한 바탕 술에 취하면 신숭겸 장군의 허수아비를 붙들고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는데 본시 전라도 태생인 신숭겸 장군이 과연 함께하던 의형제인 왕건의 뒤통수를 쳤는가? 이다. 그는 자신의 목을 아끼지 않고 주군인 왕건을 살리고 장렬하게 전사했으므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게 진짜 전라도의 기질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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