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제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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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제35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9.07.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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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민주 평화 노인회 전남 무안군지부 회장 문경주=다음은 발언신청 순서에 따라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영가의 주장을 듣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안 영가가 등단하자 참석 중이던 많은 영가들이 술렁거리며 “저런 쳐 죽일 놈!”이라는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자, 흥분하지들 마세요. 여러분이 천하의 몹쓸 놈으로 나를 미워하여 1996년 10월 23일 오전 10시에 인천 자택에서 버스 운전기사 출신인 박ㄱ서 씨에 의해 복날 개 잡듯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은 안 영가올시다. 사실 나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한, 나름대로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집안은 북한에서 재산가로 떵떵거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김일성 이놈이 공산 정권을 들먹이며 개인 재산을 국유화하여 알거지가 되었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월남을 결심하고 1947년에 남한으로 내려와, 이 땅에서 공산당을 무찌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서북청년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김창룡을 만났고, 그분의 소개로 1948년 육사 8기생으로 군대에 들어가 혼란기에 활동하면서, 1949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내 인생이 거칠게 꼬였습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에 김구 선생에게 네 발의 총을 쏘면서 마음속으로는 나도 울었습니다. 27년간이나 중국을 떠 돌며 독립투쟁을 했을 뿐 아니라, 한 생애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내 심정이라고 편안했겠습니까? 하지만 김구 선생은 평소에 조국이 해방되면 정부 청사의 문지기를 해도 더 이상 소원은 없겠다던 분인데, 성사 되지도 않을 남북통일을 구실로 권력을 잡으려고 군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당시의 상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암살하기 위해 ‘백봉일지’란 암호명으로 민족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해 공작 했었습니다. 그 공작지시는 제가 소속된 헌병대와 미국 CIC 첩보 부대의 데스크에도 내려왔던 겁니다. 당시에 나는 포병 대위였지만 헌병대의 지휘를 받았으며, 미국의 CIC 방첩대와 ‘백의사’ 암살단에 가담되어 있었기에 이 나라 심장부의 정보 내역들을 손바닥 보듯 하고 있었습니다. 관련하여, 우리는 암살 공작에 관련된 정보를 장은산 사령관에게 그날그날 일일 보고했으며, 신성모 국방장관에게는 주간 보고를 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에 관련된 파일을 ‘백봉일지’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는데 백범의 ‘백’자를 따고 머리를 의미하는 봉우리를 제거한다는 공작으로 ‘백봉일지’를 거사 완료되는 날까지 일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첩보기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군부 총수인 국방장관에게까지 보고할 정도로 당시엔 국가 존망의 과제였던 겁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처음부터 남북통일을 생각지 않았으며,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 소련과 함께 남북한을 나누어 지배한다는 묵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승만 하나면 족했습니다. 김구선생이 나서서 남북한 통일정부 어쩌고 해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 통일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남북한을 분할하여 소련이 북쪽을 지배하고 남쪽은 미국이 지배하는 것으로 타결되었어요. 그렇지만 국제 전략적 측면에서는 장개석을 도와 모택동을 몰아낼 수 있다면, 장개석이 통치하는 중국을 민주진영으로 끌어들여 한반도를 중국에 맡긴다는 구상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맥아더는 1948년 3월 9일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맥아더의 경쟁 상대였던 아이젠하워는 비상시국이 아니라면 군인이 정치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성명과 함께 그 자신도 대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맥아더는 큰 타격을 입어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출마하였으나, 승패가 불분명한 선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여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 위스콘 주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면 그때 비로소 선거에 적극적으로 투신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예비선거 결과는 무참히 패배하여 실망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시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의 활동상을 설명하겠습니다.

1949년 8월에 드디어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부터 핵을 보유한 미국이 절대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군사력은 도전을 받게 되어, 대 공산권 봉쇄 정책이라는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 출마에 실패한 맥아더는 차기 대권 도전을 위해 확실한 공을 세울 수 있는 한국 전쟁을 멋지게 마무리할 기회로 생각하고 착실하게 준비합니다. 맥아더가 이름을 날릴 방법은 전쟁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국 전쟁을 드라마틱하게 수행하여, 그 명성으로 다음번 미국대통령에 도전한다는 야심이 있었다는 것은 그를 모셨던 참모들이 공통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49년 한반도를 완전 철수하면서 맥아더가 ‘백의사’ 요원들을 인계 받아 윌로비 소장으로 하여금 첩보 요원들을 관리하도록 하여, 서해의 도서 지방을 거점으로 북파 공작원들을 북한지역에 보내 북측의 전쟁준비 상황을 일거수일투족 속속들이 보고받았습니다. 그 중엔 김일성이 군부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행한 남침 선언 적인 연설문 사본까지 입수했으면서도 맥아더는 북한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여, 공산권으로 하여금 그들의 남침준비를 남쪽이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해방 후 미군 지휘를 받던 첩보부대들은 명륜동에 본부를 둔 KLO 8240 부대가 있었고, 그 휘하에는 위스키(Whiskey)대, 선(Sun)대, 고트(Goat)대 등 3개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그 가운데 고트 부대는 특수 공작 임무(Special Operation Unit)를 띠고 여의도, 강화도 일대를 담당했고, 선대는 대청도, 소청도 등에 분견대를 두어 공작에 임했습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일으켜 미국 대통령을 꿈꾼 대한민국의 원수일수 있습니다. 첩보 수집대상이 북한은 물론 만주 일대를 활동영역으로 정하고 정보수집 활동을 했고, 맥아더는 사실상 6·25 한국전쟁 발발 1년여 전부터 전쟁을 준비했다고 봐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맥아더가 다음 대권에 도전하는 방법은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승리를 거둔 장군으로 명성을 더 얻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전쟁은 맥아더의 야심 찬 준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전쟁 중반에 맥아더가 해임 당했습니다.
내 연설을 마칩니다.
<▶36회에서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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