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는 ‘사중지공(私中之公)’이다. 늘 공적인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한 것이다. 당시 관료들은 공적인 것을 핑계 대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신하들은 자신이 한 행동은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묘소를 명당인 수원으로 옮기려 하자 사사로운 목적 때문에 그리하는 것으로 매도했다.
이에 정조는 신하들에게 일갈한다. “경들은 내가 사적인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난 비록 처음엔 사적인 것으로 출발할 때도 있지만 반드시 공적인 것으로 연결한다. 하지만 경들은 공적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사적 이익으로 연결한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최근 청와대의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 그리고 야당의 충돌을 보면서 과연 누가 옳은가 하는 대목이 떠 오른다. 그런데 정조의 죽음은 국가 공적시스템은 붕괴로 이어졌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도 정치가 시작되고 민란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국가의 공적 시스템 중 대단히 중요한 것이 인재 선발, 즉 과거제도다. 등용문이라는 말은 황하 상류의 협곡 용문을 잉어가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속담에서 생겼지만 과거 급제를 용이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급제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과거가 공정하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이 있었다. 반면 과거가 문란하면 나라가 망할 조심이었다. 망국과 동시에 자결한 이고장 선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순조, 헌종 이후에 권세가와 외척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모든 국사가 공도(公道)를 잃게 되었는데, 과거에 폐단이 더욱 심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순조 11년(1811)에 발생한 홍경래의 봉기도 발단은 과거제도의 부패였다. ‘홍경래전’은 과거에 낙방한 홍경래가 “당일 방에 이름이 오른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면서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때도 마찬가지로 부패한 현실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황현은 “재주 많고 학식 높은 사람은 자신의 뜻을 간직해서 일절 과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요즘 메르스가 번지면서 정부 고위 관료들의 무능이 새삼 돋보이지만 고종때도 마찬가지여서 황현은 “그때 사람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시험관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응시생을 시험봐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를 급제시킨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니 고종 31년(1894)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백산 기의에서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데 있지 않고 백성을 도탄(진흙탕에 빠지고 숯불에 탐)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백성들을 살리고 나라를 반석위에 두기 위해서는 백성이 일어나 썩을대로 썩은 지배층을 일신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사시(司試)폐지와 로스쿨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를 법조인으로 기른다는 로스쿨 도입의 명분은 이미 간데 없고 ‘돈스쿨’이란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로스쿨 출신들 역시 무슨 기준으로 뽑히는지 뽑는자만 알고 있는 소수 판 검사 임용자를 제외하면 변호사 시장에서 찬밥 신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