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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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4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3.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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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 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 경 주=○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 *선거권은 무학자와 최고학부 출신자 모두 똑같이 한 표 뿐이다. *판, 검사, 국회의원, 대통령, 재벌들도 비렁뱅이의 투표권과 효력은 동일하다. *나쁜 정치인에게 투표 하면 나 죽여도 괜찮다는 위임 도장 될 수도 있다.

왕건은 나주시 영산포의 오다련 호족과 동맹을 맺고 덤으로 그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얻어 장인으로 모셨지만 신안군 압해도의 능창(수달)은 부담스러운 라이벌(Rival)로 느꼈는지, 그를 사로잡아 궁예에게 압송하여 사형시킴으로서 능창의 부하들로부터 원망은 벗어나고 그의 부하들을 왕건이 따듯하게 맞아주어 자애로운 보스(Boss)로서의 덕장이미지(image)를 발휘한 것으로 여겨진다. 압해도는 당시의 행정 구역상 전라남도의 나주목(羅州牧) 관할로서 목포, 신안, 무안, 함평, 진도, 영암군에 하당하며 이곳 청년들이 왕건의 주력 부대원들로 발탁되었다.

왕건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직할 정예 특공 부대원들이 고아였다는 정황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신라 왕족으로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원성왕에게 패배한 김주원은 경주에 눌러 산다면 장차 숙청(肅淸) 당할 것이 염려되어 강원도 명주(溟州) 오늘날의 강릉으로 피신하여 마음속으로는 신라 정권에 반감을 가지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한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인 김헌창은 신라의 지방 고을 수령으로 전전하다가 정권에 반기를 들어 한때 경상도 충청도 일부 지역을 점령했지만 결국은 토벌 당했고 그 후손인 김순식(金順式)은 정치 와 거리를 두고 상단을 운영하면서 강릉 지방의 대표적인 맹주(孟州)로 군림했다. 그의 휘하에 종속되어있던 복지겸 박술희 등등은 떠돌아다니는 거지였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으로서 박술희는 복지겸을 친형처럼 의지하고 따라 다니면서 성장했는데 개구리, 두꺼비, 뱀 등등 곤충까지 잡아먹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훗날 박술희 후손들 주장에 의하면 충남 면성군 오늘날의 당진군에 살았던 박거사라는 호족 집안에서 박술희가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는 이유로 그곳에 박거사란 사람의 유적도 없을뿐더러 복지겸을 따라다니며 강릉 호족 김순식 휘하에 종속되어 있다가 강원도 원주의 도적 떼 두목으로 알려진 양길(梁吉)의 공격을 받고 김순식이 패하자...양길의 부하가 되었고 다시 궁예의 공격으로 양길이 무너지자...궁예에게 흡수되었다가 마지막에 왕건군단에 합류한 인물이란 사실로 볼 때 충청도의 부호 박거사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이유로 부잣집 아들이 곤충을 잡아먹으며 도적떼들에게 전전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박술희가 충남 당진과 연관 되는 기록은 오직 면천 박씨라는 사실 하나뿐이며 복지겸 또한 충남 당진군 지역에 뿌리를 둔 ‘복화사’의 아들이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고, 복지겸이 왕건 정권의 초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지위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오늘날의 충남 당진군 면천 땅으로 들어간 사유에 관해서 고려사절요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도 병이 완쾌되면 다시 복직시키려는 배려로 짐작된다.

추정컨대 복지겸이 별안간 중병(혈압 중풍)에 걸려 요양 차 조용한 시골로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로 당진군 면천면 고장에 두견주라는 진달래꽃으로 빚은 술이 유래하는데 그 시작은 복지겸의 딸인 ‘영랑’이란 여자가 절절한 효녀라서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여러 가지 약술을 빚느라 진달래를 비롯한 약초를 구하러 다닌 전설이 있어 최근에는 그곳 지자체에서 진달래꽃이 필 무렵 두견주 축제를 열기도 한다.

왕건이 쿠데타를 성공시키자마자 그의 심복인 유금필 홍유장군이 충북 진천군에 기동타격대를 배치한데 이어 홍유 장군 주도로 충남 예산군에는 난민 500세대를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상황을 분석해보면 태안반도와 아산만의 건너편인 당진군 연안의 백성들 주거 군락이 오늘날의 서산시 대산항구까지 연결되어 상당한 인적자원이 분포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 사람들이 중부권 내륙으로 나오자면 반드시 예산군 땅을 거쳐야하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혹시 그 지역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반란 진압을 목적으로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마치 난민들처럼 가장하여 군속 가족집단들을 그곳에 이주 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왕건 시대에 무슨 판자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별안간 난민들이 생겨 생뚱맞게 충청도 땅에 정착시킨단 말인가? 어찌 되었건 이웃한 홍성군에서는 마군장군 환선길이 왕건 정권의 쿠데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 지역에서는 치안이 잘 확보 되었다.

환선길의 반란을 제압하여 왕건의 목숨을 구한 혁혁한 공을 세운 복지겸 장군이 중병을 얻은 경우 편안하게 요양하는데 있어 치안이 잘 확보된 한 적한 시골을 고르다가 충남 당진군 면천 땅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왕건은 서기 918년 당진군 면천면 지역의 토지 300경 오늘날의 면적 단위로 무려 180만평이란 어마어마한 농지를 복지겸에게 하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술희는 소년 시절부터 복지겸을 친형처럼 따라다니며 성장했다는 기록과 항상 복지겸의 부하가 되어 협력하다가 복지겸이 별안간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면성군(면천)으로 들어가자… 복지겸이 수행하던 그 직무 일체를 박술희가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참조한다면 복지겸이 말년을 보내는 그곳으로 박술희도 은퇴 이후에 따라가기 위해 토지와 가옥을 미리 마련해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박술희는 끝까지 개경에 거쳐하며 혜종대왕을 지키려다가 주살 당했으므로 면천 땅에서 살았던 기회는 없었으며 다만, 박술희 사망이후 살아남은 가솔들은 가까운 친형제와도 같았던 복지겸이 은거하고 있는 그 곳으로 자연스레 찾아가 복지겸에게 의탁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만약 복지겸을 비롯한 박술희 조상이 그곳 면청 땅에 살았었다면 복지겸 박술희에 권력형 위치로 보아 부모의 분묘를 將軍塚(장군총) 버금가게 성축 했을법하지만 그곳엔 유적을 비롯한 분묘가 없으며 전국 어디에도 그들의 조상에 관한 기록이나, 유적이 없는 것에서 그들을 고아출신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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