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속에서 ‘참 나를 알고 행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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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學속에서 ‘참 나를 알고 행하는 삶’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3.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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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시인 나 일 환=6·13선거가 과열 양상을 보인다. 선거에 입후보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덕목이 정치를 할 수 있는 자질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깊이를 생각해야한다. 잘못된 품격이 나라와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욕을 버리고 마음의 평안함을 얻어 정치를 한다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욕은 존재를 부정하는 부덕의 소치로 불의로 얻은 부귀는 나에겐 뜬구름과 같다 하여 ‘운아雲我’라 스스로 호를 붙인 우상 이언진은 젊은 나이 28세에 요절한 조선조의 단명한 문인의 이야기인 서정문박사의 고전산문을 따라가 본다. 그리고 나를 보며 나의 삶을 자책하는 시간을 갖음도 좋을 것 같다.

우상 이언진은 그의 스승 혜환 이용휴 스승이 그의 제자 이언진을 평할 때 ‘내가 이런 사람 찾은 지 몇 년 만에 송목관 주인 이군李君 우상(우상은 이언진의 자字를 얻었다. 군은 문학의 도에 있어서 높은 식견識見과 깊은 사고思考를 가지고 먹 아끼길 금金처럼 하고 글다듬길 단약丹藥처럼 하여 붓이 한번 종이에 떨어질라 치면 그대로 세상에 전할 만 하다.

여기서 단약은 도교의 불로장생약을 말한다. 마치 도사가 단약을 만들고 연금술사가 금을 만들 듯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능히 알아줄만한 이 없기 때문이요, 남에게 이기길 원하지 않았으니 족히 이겨볼만한 이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시문詩文을 가져와 내게 보여주고는 곧바로 깊숙이 넣어둘 뿐이다. 스승은 이어 이런 도를 가진 제자의 불우를 조리 있게 이해한다. 진견ㆍ진재 라 할 수 있는 식견과 사고, 거기에다 끊임없는 각고의 노력. 모든 것이 갖추어 졌으니 어떻게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이런 천재성을 알아주기에는 여전히 미성숙하다. 그래서 세상의 불우는 천재성의 숙명이다. 스스로를 갈무리하여 세상과 단절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오직 자신을 이해하는 스승에게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뿐, 결코 속인의 눈길로 더럽히지 않는다.

아아! 벼슬이 쌓여 일품에 이르더라도 아침에 거두어 가면 저녁에는 백수요. 돈을 모아 만금에 이르더라도 밤새 잃어버리면 아침에는 거지인 것을. 하지만 문인이나 재사의 소유는 그렇지 않아 한번 가진 다음에는 비록 조물주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가짐眞有이라네. 군이 이미 이를 가졌으니 이 나머지 구구한 것은 모두 사양하여 내치고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하네. 스승은 이제 제자에게 조리 있는 말로써 위로한다.

벼슬이 정승이면 뭐하나 한번 거두어 가면 백수인데. 억만금을 가졌다한들 다른 게 무엇인가 잃어버리면 그만인걸. 하지만 문인들이 가진 지적 능력은 비록 조물주라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유가 아니겠는가. 끝으로 스승은 조언한다. 누구도 앗을 수 없는 진정한 소유자는 신분 한계나 경제 궁핍과 같은 현상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스승이 말씀하시기를’부귀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소중한 너의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진유를 얻으라.‘ 우리는 살아가는 삶의 진의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함에도 생존하기 위한 바쁜 생활상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우리의 진정한 삶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지 다시 한 번 깊게 재조명 해보자.
진정 아름다운 세상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질없는 욕심에 사로 잡혀 진정한 나를 버리는 것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영혼의 편안함속에 진정한 나의 삶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삶에 대한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봄날 새벽바람은 왜 이리도 차가운가? 찬바람이 새벽을 깨워 몸을 움츠리게 하는 봄의 서정 속에 함몰되어 가는 춘강春崗의 마음이 깊은 번뇌의 길 위에서 발광을 한다.

세상사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밤잠을 설치며 자아의 깊은 속 알음을 했다. 인간들이 모두 다 추구하는 것을 위해 이리도 심려하고 고통을 받으며 경계하고 질타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부끄럽기만 하는 시간들이다. 그리 살아가며 얻은 부귀의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한 치도 못되는 땅속에 썩어 문 들어질 육신의 안락을 위함뿐이지, 영혼을 위한 삶은 아니지 않는가? 육신의 편함은 영혼을 저주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인간은 당장 앞에 있는 현실만을 직시할 뿐 멀리 있는 진리는 보지 못한다. 저 멀리 아름답고 편안한 영혼의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 우리들의 행복한 삶일 것이다. 가난하면 어떻고 신분이 비천하면 어떠하단 말인가? 마음이 편안한 평정심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족하지 않겠는가? 나의 생각들이 현실을 도피함도 아니요, 현실을 직시함도 아니다.

다만 영혼의 깨달음 속에서 육신보다는 저 멀리에 있는 영혼의 맑음을 기억하고 그 맑음 속에서 평안을 얻자는 것이다. 정치도 그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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