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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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4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5.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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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 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경주=■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정직한 투표의 결과를 먹고산다.
■ 왕건의 훈요 8조는 비교적 명쾌한 문장이다.

요약하면 후백제 또는 궁예 정권 등의 統合之怨犯(통합지원범)으로부터 반란을 경계하라는 경고이지만, 후백제의 견훤과 궁예는 이미 사망했으므로 그 휘하의 누군가가 정권을 욕심내는 불특정 대상들 중에서 반란의 괴수가 나타날 가능성을 摘示(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견제의 대상은 궁예, 견훤, 단, 두 사람의 잔존 세력으로서 津(진) 驛(역) 雜尺(잡척)에 속하는 무리들이 권력에 빌붙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내용이다. 4) 왕건의 유언에서 경계 대상은 둘이 된다.

첫째: 견훤 세력은 고려에 통합지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 하나는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을 지지하는 세력이지만 견훤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전라도와는 끈끈한 관련이 없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출생지는 문경시 가은읍에서 약 1.5km 들어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조용한 마을이 ‘갈전리’이다. 그 곳에서 주민들에게 견훤출생지를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거나, 직접 안내해 주시는 분도 있다. 큰 길로부터 걸어서 100여m 후미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견훤의 탄생설화 안내판과 함께 견훤이 태어났다는 金霞窟(금하굴)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부유한 농가의 딸이 거처하는 방으로 밤마다 멋진 소년이 찾아와 사랑을 나누다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아버지가 일러준대로 바늘에 실을 꿰어 옷에 꽂아놓고 다음날 아침에 실을 따라 갔더니 토굴 안에 큰 지렁이가 숨져있었다는 것이다. 지렁이의 자식으로 알려진 견훤왕의 무덤은 고향에 묻히지 못하고 전라북도 익산군에 쓸쓸하게 잠 들어있다.

또한 견훤은 자신의 아들로부터 쿠데타를 당해 금산사에 연금 당했다가 탈출하여 고려로 귀순해 왕건으로부터 형님으로 모셔지고 있었으며 견훤이 최초 신라에 반기를 들어 무진주(전남 광주)장악에 중추적인 힘을 보탰던 사위이자 동지로서 전남 순천 앞바다의 마로산성 성주였던 박영규도 고려에 망명하여 왕건의 셋째 부인인 충청북도 충주 세력 유긍달의 딸인 유씨 부인의 아들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정종은 동생 광종과 더불어 전라도 출신 혜종대왕을 제압하고 형제가 차례로 고려의 왕위에 올랐으며 더욱이 견훤은 왕건과 함께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마지막 전투에 직접 참가했으므로 후백제 세력들이 왕건에게 통합지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과 견훤의 동지이자 사위인 박영규도 고려로 歸附(귀부)했는데 그 휘하 잔존 세력이 고려에 원한을 가질만한 명분과 원한이 없는 것이다,

둘째: 궁예 세력은 왕건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있다. 궁예는 충청도 세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하던 사람으로서 철원 도읍지에 자신을 지지하는 청주인들 1천호를 이주 시켰다. 옛날에는 대가족 제도로서 한 戶(호)의 가문에 하인 종속들까지 합치면 수십여 명에서 수백여 식솔들까지 거느리는 호족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게 본다면 그 숫자는 한 호당 1명 이상으로 계산해도 1천명은 무조건 넘을 것이고 수천여명에 달할 수 있다. 그 실례로서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할아버지 이 안사가 강릉을 거처 원나라 치세의 동북면까지 옮겨갈 때도 그 한 호(戶=가문)에서 노비만 120여 명을 거느리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궁예가 자신의 정권 지지세력 결집 목적으로 이주시킨 청주인 들이 비렁뱅이 수준의 빈민들 집안일 수는 없고 청주인 들이라고 해서 꼭, 청주 시내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에는 5원경이 있었는데 역사 지도를 살펴보면 서원경은 오늘날의 행정 구역상 청주에 있었고 웅주(훗날 공주)는 서원경에 속해 있어 청주가 통일신라시대엔 충청권의 중심 도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궁예가 자신의 도읍지인 철원의 태봉국으로 데리고 간 청주인 들이라고 해서 청주시내에 사는 몇 사람을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공주시 까지를 망라하여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즉, 서원경 중심의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공주 일원까지를 포함하여 청주인들로 총칭하는 것이고 이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떠나 궁예하나 믿고 철원으로 이주해 갔으므로 궁예는 국왕인 동시에 곧, 가장(家長)과도 같은 존재이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삶의 전부일수 있다.

그러한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원통하게 살해되었다면 당연히 통합지원을 가지고도 남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왕건이 쿠데타에 돌입하면서 ‘왕공께서 의로운 일에 나섰다고 소문을 내자, 궁예는 혈혈단신으로 도망쳐 평강 땅 삼방 고개 밑에 은거하다가 그곳 농민에게 발견되어 주살 당했고, 모든 백성들이 궁예를 나쁘게 평가하고 왕건을 칭송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口傳(구전) 野史(야사)에 의하면 왕건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철원군민들은 물론, 수많은 백성들이 나서서 궁예를 호위했으며 경기도 파주에서부터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가 왕건의 쿠데타 군에게 궁예 호위군이 밀리기 시작하여 포천군의 산정 호수를 끼고 대치하며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궁예가 인근의 산속으로 피했으며 그곳에서 왕건의 쿠데타군에게 발각되어 피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궁예는 물론 그를 따라 철원으로 이주한 충청인들의 한을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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