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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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 81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20.06.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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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통일코리아 지도자회 이사장 문경주=일본군이 대동아공영권 구성을 목표로 하는 대 성전이란 국가목표로 원칙을 생명으로 하는 군인으로서의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는 군대조직에서 부패한 협잡으로 장교를 추천하는 그런 썩은 조직이 딜 소지가 있도록 아무나 군관이 될 수 있는 허술한 심사 제도를 채택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간도특설부대는 조선인민 혁명군과(김일성 포함)두 차례 대규모 전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38년 8월 23일 안도현 대 사하와 대 장강 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를 대 사하전투라 칭합니다. 이때 간도특설부대원들은 500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고 되어있지만 대 사하전투가 벌어졌던 1938년 8월은 박정희가 아직 만주에 가기 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작가 유연산 씨가 쓴 책에서 박정희가 대 사하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유훈 자격을 얻어 만주군 시험 자격을 추천받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으며 유연산씨도 잘못된 제보를 인용했다는 요지로 사과했다는 겁니다.


그렇더라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과연 간도특설부대원이 얼마나 되는 규모였느냐 하는 겁니다. 이 전투에서 사상(死傷)당한 병력만 500명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껏 대한민국에 유통되는 간도특설대원 명단 79명이 전부라며 그 속에 박정희란 이름이 없으니 박정희는 간도특서대원이 아니라는 증거로 법정에 제시한 자료조차도 신빙성이 없다는 정황입니다. 따라서 간도특설부대원들은 7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 사하전투에서만 간도특설대원 500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며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는 주장을 대입한다면 700명이 넘는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관련해 전체의 명단 700여 명 중에도 박정희가 없는지는 미확인 상태라고 할 때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원이 아니었다는 증거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박정희가 양민학살을 통해 공을 세우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 자격을 얻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본다면 박정희가 만주에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1939년 5월경을 전후한 시기는 대 사하전투에서의 간도특설부대 참패로부터 불과 8개월 후이므로 얼마나 이를 갈면서 강력한 부대를 새로 창설하려 했겠느냐 입니다.


단, 한 명의 조선인이라도 대원으로 더 받아들여 강력한 전투력을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시기에 혈서까지 쓰면서 만주 군인이 되고 싶어 지원한 조선 청년 박정희에게 만주군관학교에서 받아주고 싶은 욕심은 간절했을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나이는 초과되었고 결혼도 했으며 만주국적도 아님으로 징모(徵募)조건에는 100% 탈락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만주군 지원 자격이 주어질 수 있는 간도특설대의 지원입대와 유훈 추천 지원자격의 안내를 해주었을 것은 당연한 절차였을 겁니다.


혈서까지 쓰면서 입대하고 싶어 했던 일본군인의 꿈을 가진 조선 청년 박정희에 단, 하나의 길뿐인 간도 특설대 지원을 포기했으리라는 것은 박정희지지 세력들 말고는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의심이며 무엇보다도 강재호 대장이 박정희를 데리고 군관지원 시험장에 들어왔다는 이재기 생도 등의 증언은 합리적인 신뢰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강재호와 같은 여관에서 기숙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특별한 관계를 유추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강재호 대장 입장에서 본다면 1938년 대사하 전투에서 간도특설대원들이 궤멸하다시피 해 일본인 특설대장 원칙제도가 조선인으로 바뀌어 새로운 지휘자로 부임한 강재호가 만주군관학교로부터 간도특설부대를 정상 복원하기 위해서 16명 이상의 지휘관 선별목표로 유훈 대원을 양성하는 전공을 올려 만주군 입학자격을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작은 공로라도 빨리 세워 일본으로부터 인정받고 부대 운영 재원과 무기들을 지원받아 간도특설부대를 더욱 강고하게 하려는 것이 제일의 목표였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지역에는 독립군이 없었으므로 유공에 눈이 먼 비굴한 자들은 양민들을 학살해 공비로 둔갑시키는 악행은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만큼 허위전공을 세우기가 용이했으리라고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민들을 아무나 학살해도 죽은 자는 말을 못할 것이니, 죽은 양민의 머리만 들고 가서 공비를 잡아왔다고 우기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본군 체계의 허점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박정희 지지자들은 간도특설부대와 가짜영웅 박정희가 연관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공비토벌엔 박정희가 110회 이상 참가했으나 (양민학살) 작전에는 전혀 참가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 110회의 공비토벌이 간도특설부대 또는 일본군대, 전체의 작전을 합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군에서는 직접전투에 참가하기보다는 지휘부에 근무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으며 공비토벌의 주무 부대는 간도특설부대란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또한 합리적 의심대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여하튼 공비토벌에 참가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작전 중엔 단, 한 명의 양민도 학살한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가짜영웅 박정희가 간도특설부대에 참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다만, 당시의 정황이 그를 의심받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1940년 6월 연길 현과 안도 현에서 군사적 활동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대 사하에서 만주군 간도특설부대와 예기치 않았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대 사하치기 전투라 하며 당시에 간도특설부대는 만주국 군관학교 생도들까지 예비대로 편성해 토벌작전에 투입해 싸웠으며, 그때 가영웅 생도도 참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82회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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