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묻었다” “매장 지시”…계엄군 뒤늦은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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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묻었다” “매장 지시”…계엄군 뒤늦은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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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0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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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4주년 ‘상’] 5·18 조사위 핵심 증언자들 암매장 인정 진술
“묻어라” 지시 교차 확인…발굴조사 결실 없어
5·18민주화운동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 2지역대 7중대장 중대장을 맡았던 박성현(74)씨가 지난 3일 광주 북구 각화동 옛 광주교도소에서 자신이 들은 항쟁 희생자 암매장 사실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 2지역대 7중대장 중대장을 맡았던 박성현(74)씨가 지난 3일 광주 북구 각화동 옛 광주교도소에서 자신이 들은 항쟁 희생자 암매장 사실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광주타임즈] 44년 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에 숨진 행방불명자들이 암매장됐다는 증언과 정황은 차고도 넘친다. 5차례에 이르는 검찰 수사·정부 조사를 거쳐 공식 사실로 인정되고 있지만, 정작 매장 추정지 발굴 조사에서는 행불자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기대를 모았던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마저 소기의 성과만 거둔 채 진상 규명하지 못하면서 끝내 미완의 진상 과제로 남았다. 사후 수습 또는 훼손·은폐 의혹 등까지 배제할 수 없는 만큼, 폭넓게 진상을 밝혀낼 전담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편집자 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는 항쟁 당시 계엄군들의 진술을 대조 검증한 결과, 민간인 희생자 암매장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암매장에 가담 또는 지시하거나 보고들은 계엄군 장병들을 직접 조사해 구체적 핵심 증언을 확보했다.

■ “내가 묻었소” 암매장 가담 진술 확보

“40년 지나서야 양심의 가책을 느끼오.”

5·18 당시 31사단 11병참선경비대대 4중대 소속 방위병 출신 정재희(69)씨는 희생자 시신 2구를 암매장했다고 고백하며 이같이 말했다.

정씨는 당시 31사단이 맡은 북구 운암동 광주변전소 수비 작전에 투입, 1980년 5월 22일 오전 군 수송차량에 몸을 실었다.

이동 중 운암동 일대 총격전에 휘말렸고, 총소리가 멎은 직후 ‘사람이 죽어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후 앞서던 군 수송 차량이 시신을 싣고 부대로 되돌아갔다고 정씨는 회고했다.

이튿날 오전 정씨는 소대장 명령을 받고 가마니에 덮인 채 사단 후문에 방치돼 있던 시신을 70여m 떨어진 야산에 묻었다. 시신의 얼굴이나 소지품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정씨는 24일에도 시신을 직접 묻었다고 했다. 광주변전소 주변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 숨진 지 하루 만에 발견된 희생자를 지시에 따라 신안동 모처에 매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정씨가 신안동에 묻은 희생자 중 1명의 신원은 같은 해 6월 수습된 고(故) 강정배씨로 확인됐다. 그러나 31사단 야산에 묻힌 시신의 신원과 행방은 알 수 없다.

■ “직접 매장 지시” “묻고 왔다고 했다”

당시 3공수여단 본부대장이던 김승부(77)씨는 3공수여단 영선반장인 홍봉칠(89)씨에게 옛 광주교도소 내 암매장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95년 검찰 조사 당시부터 줄곧 부대원들에게 지시해 교도소 북쪽 담장 주변에 시신을 묻었다고 증언해 왔다.

지시를 받았던 홍씨도 5·18조사위가 마련한 김씨와의 대질 조사에서 경험한 사실이라며 인정했다.

5·18조사위는 ▲김씨의 지시(‘시신 10여 구를 구덩이 3곳에 나눠 묻게 했다’) ▲홍씨의 기억 진술(‘담장 주변 종묘장 가까운 곳에 묻었다’) 등으로 미뤄, 당시 교도소 동문 앞 주차장·주변 하천에서 암매장 지시와 실행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3공수여단 11대대 2지역대 7중대장이었던 박성현(74)씨도 “암매장이 분명 있었다”면서 5월 23일(추정) 오전 10시께 교도소 정문에서 경계 근무 도중 만난 3지역대원 5명과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진술했다.

어디 다녀오는지 묻자, 3지역대원들이 현 농산물도매시장 방면 야산을 가리키며 “시신 5구를 묻고 왔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당시 매장 유해 중 1구는 5월 22일 교도소 주변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로 유력 추정된다고 5·18조사위는 추정한다.

■ 암매장은 사실인데…유해는 어디에

조사위는 조사 대상자인 계엄군 장병 2032명 중 암매장 연관 핵심 증언자 57명을 추려냈다. 이 중 암매장 직접 실행자는 9명, 매장 목격자는 13명, 전해 들은 자는 35명이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행한 2인 이상 동시 참관 발굴·대질 조사 과정에서는 암매장 유해가 단 1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위 활동 과정에서 출토된 무연고 유해 등 280구에 대한 유전자 검사에서도 성과는 없었다.

5·18조사위는 현재 행방불명자를 178명(인정자 73명·불인정자 105명)으로  잠정 산정하고 있지만 이 중 유해는 단 1구도 찾지 못했다.

암매장 유해 찾기가 끝내 미궁에 빠지자 계엄군 출신 양심 증언자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정씨는 “묻은 당사자라서 잘 알 수밖에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뒤늦게 고백했는데 발굴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김씨도 “묻고 왔다는 이야기, 교도소 주둔 사병 사이에 돌던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지만, 정작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관련기사 추후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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