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 150명 목숨 구한 경찰은인, 어디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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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 150명 목숨 구한 경찰은인, 어디 계신가요”
  • 광주타임즈
  • 승인 2017.06.2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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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누명 쓴 함평주민 150명 살려낸 경찰
정확한 이름·행방 알지 못해 67년간 고마움만 간직

[함평=광주타임즈]나근채 기자= 하늘은 맑았지만 초겨울 산속 마을에 부는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11월17일. 이날 전남 함평군 신광면 삼덕리 좌야마을에서는 진주 정씨 문중 시제(時祭)가 치러졌다.

평온했던 마을은 인근 불갑산에 주둔하고 있던 빨치산들이 좌야마을 어귀 세장산에 진을 치면서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 후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과 소탕작전에 나서던 경찰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마을은 시신과 부상자의 신음으로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기습작전을 마친 빨치산이 퇴각한 후 오후 5시 해질녘이 되자 경찰이 마을에 소집령을 내렸다.

빨치산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한 경찰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주민 150여 명을 마을의 한 밭으로 집합시켰다.

총격전에서 동료 15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자 경찰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3열 횡대로 앉아 있던 주민들 앞에서는 경찰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내통자가 누구인지 다그치는 경찰의 윽박과 방아쇠가 곧 당겨질 듯한 절체절명의 순간이 이어졌다.

그 때 차량 한 대가 마을에 들어왔다. 영광경찰서장이었다.

서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전후사정을 들은 뒤 "총격전과 마을 주민들과는 무관한 것 같다. 경찰이 양민을 죽여서는 안된다"며 총구를 거두도록 했다.

죽음의 문턱 앞에까지 갔다가 살아난 주민들은 전쟁통에 영광서장에게 고맙다는 변변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전쟁이 끝난 뒤에 '사은비(謝恩碑)'라도 세우기 위해 서장을 수소문하고 나섰으나 이름과 행방을 찾지 못했다.

서장에 대한 고마움은 67년이 흐른 지금도 변함이 없다. 생존자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주민들을 구한 서장에 대한 이야기는 자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현재 마을 주민들은 서장이 제10대 영광경찰서장인 이차동 경감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재임기간이 비슷하고 이 경감이 영광을 중심으로 북한군과 빨치산을 소탕했다는 일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감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아직까지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생존자 모종렬(83)씨는 "당시에는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꼼짝없이 죽게됐다고 생각했는데 서장이 도착한 뒤에 기적이 일어났다"며 "서장이 생존해 있지 않다면 유족에게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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