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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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라
  • 광주타임즈
  • 승인 2016.02.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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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논설위원 최수호=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과제를 떨쳐버리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곧 ‘개별적인 내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미국의 9.11테러의 대참사처럼 이승을 하직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들이 무수히 저승으로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불의의 공습에 의한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을 전혀 하지 못한 채 당하면서 도움의 손길만을 기다리다 저승에 간 건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 죽었던 사람들 중 알고 지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지만 이런 순간들을 맞이해야만 했던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죽음’ 정도로 간단히 넘어가기엔 인간으로서 잔인해 보인다. 그래서 ‘나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에 대한 집착을 하면서 인생의 사고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궁리해 보지만 늘 ‘불가항력’이라는 상식적인 말로 위안을 삼는데 그치고 만다.

더욱이나 누구나 다 언제까지나 젊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제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한다 해도 평생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 없으며, 아무리 못마땅해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이 들어서 젊음을 그토록 그리워해도 쇄한 기운에 편입된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만 하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못마땅해도 늙고 병들고 죽는 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숙제는 늘 따라다닌다.

물론 쓰나미처럼 대자연이 내린 재앙을 개인 차원에서 막아내거나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으며, 우리에게 어떤 특별히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인생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처럼 산다는 게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으므로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와 일체화하여 국가의 번영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는 등식을 성행케 했던 군국주의시절에는 국가를 지켜내야 한다는 명분에 전쟁터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추모는 국유화되어 버렸고 전사자의 숭배는 국가숭배와 조국애로 해석되었다.

특히 요즈음에는 오래 살면서 보지 않아도 될 일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당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으로 시련을 겪지만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천수를 다한 자연사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추세가 강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비명횡사하든 천수를 다하고 자연사를 하든 어떤 죽음이라 할지라도 애증이 묻어나는 세상과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을 우울하고 어둠께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젊어서 아내나 남편을 잃은 사람들은 대체로 “젊음어서 세상을 떠난 당신은 특별히 신의 사랑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라고 말한다.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데려간다.’는 말은 진정으로 신의 사랑이 부러워서 그렇게 표현했을까? 아니면 슬픔에 젖어 비탄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려는 말작난일까? 아마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말 일거다. 이처럼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자기 자신의 죽음을 신의 사랑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실제로 생로병사나 산다는 건 괴롭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사람 또한 거의 없다. 그런데 어떤 인생의 문제가 앞길을 막을 때 우리는 흔히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거나’, ‘자신이 세상에 맞추거나’, ‘세상에 대응하지 않고 피해버리거나’하는 세 가지 삶의 태도 중 하나를 취한다. 세상을 자기 힘으로 바꿔 살겠다는 것은 세상이 자신에게 맞추어줄 리가 없는 게 세상사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리 쉽게 찾아지는 삶의 방법이 아니므로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도록 살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생활태도다.

자신을 바꾸어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사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내가 나를 바꾸는 게 쉬워 보이기 때문에 좋은 방법으로 보이지만 자기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노예로 살아가는 샘이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비탄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간다면 문제는 항상 문제로 남아있을 뿐 해결되는 게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결실도 없다.

실제로 세상이나 타자가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분노하거나 슬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한탄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세상에 분노를 터트리는 게 일반적이며 “왜 하필이면 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생로병사처럼 피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면 종종 자신을 대신해서 타인이나 세상이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대응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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