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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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 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7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3.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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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 경 주=역사 왜곡 바로잡을 100가지의 수단 방법론은 단, 한 사람의 바른 인식만 못하다.

역사 왜곡으로 정신이 황폐해진 결과는 남남 남북 갈등의 원초적 뿌리이다.

왕건이 사망하기 2년 전인 서기 941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熊州(웅주)를 公州(공주)로 개명했다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왕건의 유언과 사망 시기인 서기 943년 5월로부터 1천년 후인 서기 1866년에 사망한 김정호의 목판본 지도에도 여전히 금강을 熊津江(웅진강)으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000년전 왕건의 훈요(訓要)에서 공주강을 언급했을 가능성은 0%이며 금강이 명명되기 이전까지는 ‘웅진강’으로 불리다가 근세에 와서 공주 강으로 혼용 되어졌으며 비록 왕건이 사망하기 2년전에 웅주를 공주로 고쳤다고 하더라도 이미 죽음을 앞둔 노세 한 노인네가 장차 공주 강으로 고쳐 불러질 것이라고 예측했을 리도 없으므로 그냥 공주외(公州外)라고 했을 개연성이 많다.

2)왕건의 훈요 8조 공주강이란 용어는 후세에 삽입으로 짐작되며 서기 943년 5월경에 작성된 훈요 8조에 공주강이란 용어가 등장할 수 없다. 아마도 원문엔 車峴(차현) 以南(이남) 공주외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를 公州江外(공주강외)로 조작, 위조된 것으로 의심되며 굳이 江(강)을 끌어다 붙인 까닭은 호남을 역한 땅으로 해석하기 위해 군산까지 뻗어있는 오늘날의 금강을 공주강으로 인식시키려는 논리로 교묘하게 오도(誤導)해야 그 아래의 호남이 역한 땅이라고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목적을 가진 흉계가 숨겨졌거나, 또는 잘못된 견해가 아닌가? 추측된다.

3)몽골군이 차령으로 나아갔다. (동의하지 않음)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23년 8월 기사에는 “몽골군 100여 인이 溫水郡(온수군)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車峴(차현)으로 나아갔다. 그곳이 공주군에 있는 (차령(車嶺)이며 곧 車峴(차현)이라는 증거다. 이 기록도 아주 잘못 된 이유로 공주에는 차령(車嶺)이 있을 뿐 차현(車峴)은 없기 때문이다.

4) 왕건의 유언 8조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정황들...왕건 사망 후 80년 후인 서기 1,023년에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여 왕실 전체가 불타 모든 사료가 없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절요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최재안과 최항’이라는 두 신하가 史家(사가)에서 訓要十條(훈요십조)의 필사본을 발견했다며 왕실에 제출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항과 최재안의 조상들이 신라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는 이유로 신라계가 湖南界(호남계)를 모략하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굳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이 왕족도 아닌 바에야 왕가의 유언을 신하들이 보관할 필요가 있었겠느냐 이며 다만 그들 조상이 신라계라는 사실 때문에 호남을 배척할 목적으로 왕건의 훈요10조 유언 필사본을 보관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 말고는 조작된 유언으로 볼 근거는 미약해 보인다.

하지만 왕건 사망 후 489년인 서기 1,432년 조선의 世宗祖(세종조)에서 八道地理誌(팔도지리지)를 편찬하여 무려 98번이나 增補(증보)를 거듭했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은 왕건 사망 후 538년이 지난(成宗(성종)12년)서기 1,481년의 기록이며 당시에 성종의 명령에 따라 盧思愼(노사신) 梁誠之(양성지) 姜希孟(강희맹)등에 의해 편찬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은 8번 째의 증보판으로서 서기 1530년 中宗(중종)25년이며 李荇(이행) 尹殷輔(윤은보) 洪彦弼(홍언필) 등이 5권을 추가 집필하여 전체 55권으로 불어나게 된다. 바로 이 增補(증보)라는 역사서 보완과정에서 학자의 양심과 오도된 견해에 따라서 본문 내용들이 변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적인 분석과 정황 자료에 의한 철저한 객관적 재해석이 필요하다.

5) 그간의 훈요 8조 엉터리 해석들

훈요 10조 중 8조는 왜곡해석이 확실한 것 같다. 고려사절요의 온수군을 오늘날의 온양온천으로 보고 있으며 몽골군이 그 곳으로부터 남쪽인 공주시 유구면 쪽으로 내려와 ‘치흘각’을 넘어서 광정리에 있는 차령고개를 통과하여 다시 천안을 거쳐 차현(車峴)으로 올라갔다는 요지이다. 이는 왕건의 훈요 8조 ‘車峴(차현)을 車嶺(차령)’인 것처럼 꿰어 맞추기 위한 궤변적 해석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로 당시엔 차령산이 가로막혀 온수군에서 유구를 통해 광정으로 넘어오는 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령 고개는 고려시대의 도로가 아니라, 조선 말기에 개설된 길이며 몽골군이 그렇게 멀리 돌아서 車嶺(차령)으로 돌아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왕건의 훈요 8조 조작은 조선말기 이후에 감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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