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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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황해인들이 개국한 코리아 (10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4.1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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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한국사이버문학인협회 이사·시인 문 경 주=■ 부패한 후보의 금품 안 받고 안 찍어주면 민주시민, 받으면 형사범죄인 된다.

한반도 전역에 걸쳐 숫자를 파악하기조차도 어려울 만큼 전국 방방곡곡에 많이 산재하는 車峴(차현)고개(수레티재, 또는 수리재)들 중에 몽골군이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훈요 8조에서 말하는 車峴(차현)이다고 단정할 수도 없으며 특히 공주 근방에 있다는 車嶺(차령)과 車踰嶺(차유령)은 車峴(차현)도 아니고, 분명하게 車嶺(차령)이다. 용어의 쓰임 상 수레가 넘을 수 있는 곳은 嶺(령)이 아니라 峴(현)자를 썼으며 그 사례는 전남 목포의 석혁동 부산의 대현동, 서울의 아현동, 논현동, 회현동, 갈현동, 율현동, 등등 모두 다 나지막한 고개로서 수레가 통행하던 길이다.

몽골군이 공세 창고를 공격하여 세곡을 탈취해서 그 무거운 군량미를 싣고 변변한 길도 없었을 공주로 내려가서 미쳤다고 3일씩이나 더 걸어서 U자형으로 먼 길을 되돌아 車峴(차현)기지로 갔겠는가? 말이다.

6) 훈요 8조 원문(原文) 해석 (次 八日)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赤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 國戚婚姻, 차현이남, 공주강외, 산형지세 병추배역, 인심적연, 피하군주인, 참여조정, 여왕후 국척 혼인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득병국정, 즉혹변란국가, 혹형통합지원, 범필생란, 차기증속관사노비, 진역잡척, 혹투세이면,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혹부왕후궁원, 간농언어, 농권난정, 이치재변자, 필유지의, 수기양민, 불의사재위용사, ◎위 문장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해석 보자.車峴以南(차현이남) 통일 신라 때부터 한 반도의 주요 관통 도로였던 충북 음성군과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이어지는 車峴(차현) 또는, 수레티 고개가 한반도의 유일한 교통 요충지로 번화한 도로였다.

6, 필자가 진짜 車峴(차현)을 가다

충북 음성군 삼성면 지도상에 ‘수레티 고개’로 표기된 곳이 진짜 車峴(차현)고개다. 지도상의 ‘망이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의 세 나라가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여 서로가 빼앗아, 국경 초소로 활용해 자국의 영토 방어 사령부로 이용했던 군사 기지이며 삼국은 이 城(성)을 빼앗기 위해 전투를 치른 교통의 중심지였고 몽골군대가 침략해왔을 때는 그들의 중간 군사기지로 활용해 이곳에서 발진해 충남 아산의 세곡창고를 공격하고, 바로 이 車峴(차현)고개로 되돌아갔다는 설명이다.

왕건의 훈요 8조에서 ‘차현이남’이란 바로 이곳을 기준하여 그 아래쪽을 의미하는 말인데 엉뚱하게도 충남 공주시의 차령고개를 차현으로 둔갑시켜 호남을 가리킨다는 엉터리 뜻으로 왜곡 해석한 것이다. 한반도의 남해와 서쪽은 백제가 해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신라와 당나라의 해상 무역이 자유롭지 못하여 내륙의 관통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김춘추는 ‘羅濟 同盟(나제동맹)’으로 고구려와 전쟁하여 확보한 唐港(당항)도로는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위치해 있던 唐港城(당항성)까지를 의미하며 그 길을 이용하여 신라의 주요 물류가 당나라로 오갔던 것이다.

백제는 위쪽에 숙적인 고구려와 신라의 당항로가 가로막혀 있었으므로 그 쪽으로 물류를 운반할 수도 없었고, 당시는 한강에 다리가 없었으므로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성으로 오갈수가 없어서 백제의 수레가 공주군의 차령 고개를 넘어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만약 고구려와 백제의 무역이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백제의 도읍지가 있던 공주강과 부여를 이어서 흐르는 오늘날의 금강이라는 자연수로인 물길이 확보되어 쌀 500석을 실을 수 있는 뱃길 수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금강을 통해, 서해를 거쳐 대동강으로 올라가면 평양과 맞닿고, 당나라도 갈수 있는데 겨우 쌀 열석 정도를 수레에 실은 백제의 물류가 무엇 때문에 여러 날을 걸어서 한강, 임진강, 대동강, 나루를 어떻게 건너 머나먼 평양을 왕래 할 수도 없었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공주의 차령 고개는 산형이 급한 오르막 경사라서 당시엔 수레가 통과할 수 없었고 오직 사람들만 걸어서 넘나들던 통행로였으며 조선 말기에 일본 식민 통치자들에 의해서 현대식 토목 공법으로 산을 깎아 우마,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차령 고개를 근래 학자들은 역사적 고찰을 度外視(도외시)하고 현재 보이는 것에 기초하여 마치 왕건 시대에 서남 권역으로부터 한반도의 관통도로가 있어서 왕건의 유언에서 차령고개가 한 반도의 번화한 유명 교통 기준점이었던 것처럼 엉터리로 해석한 것이다. 海路(해로)를 접한 곳은 수레가 필요 없으며 오히려 육지를 굴착하여 運河(운하)를 만들던 시대에 금강이 가로막고 있는 곡창 지대인 호남의 물류를 실은 수례가 왜? 그리고 어떻게 금강, 한강이 가로막고 있는 북쪽으로 왕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公州江外(공주강외)란 말은 공주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 연기군의 부강과 부여의 백마강까지 원이 겹치는 지점을 의미하며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차현과 공주강 사이의 그 Boundary(바운더리) 안에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공주강외는 한참 아래 지역인 호남을 지칭한다. 라고 엉터리로 해석 했다. 만약 공주강 아래를 의미한다면 공주강 以南(이남) 또는 以下(이하)라고 해야 맞고 차령을 ‘차현’으로 인용했다고 하더라도 車峴以南(차현이남) 公州江外(공주강외)란 기준점이 중복되어 문장이 충돌 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강들은 州.郡.縣.(주,군,현,) 중심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옥천 지역을 흐를 땐 적등진강, 청주지역을 흐를 때는 청주강, 연기군을 흐를 때는 부강, 공주군을 흐를 때는 웅진강,이며 부여군을 흐를 때는 백마강이고, 군산 지역을 흐를 때 비로소 금강이 된다. 따라서 공주강외는 공주에서 연기군 부강외와 부여군의 백마강외까지의 원을 그려 겹치는 부분을 의미하여 공주강외가 백마강 금강 동진강을 뛰어 건너 호남을 지칭한다는 말은 천부당만부당 한 왜곡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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