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 현대사) 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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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0년 (대한민국 근 현대사) 42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9.09.2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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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민주평화노인회 전남 무안지부 회장 문경주=나라 밖의 적성국가들(중국, 일본, 미국, 소련) 대한민국의 적성국은 중국 소련 미국 일본이었다. 첫째, 제1의 적성국은 중국입니다. 중국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이어서 고려 500년, 조선 500년 장장 1천년을 통해 우리 민족을 간접 지배 형태로 압박했기 때문이지요. 둘째, 제2의 적성국은 일본입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종말을 맞게 한 지울 수 없는 침략국으로서 그때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36년간이나 우리나라를 침략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3의 적성국은 미국입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의 참모인 태프트 국무장관을 특사로 일본에 보내, 가쓰라 내각에게 너희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할 테니,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 지배하는 데 동의해 달라는 요지로 소위 ‘가스라·태프트’ 밀약(密約)에 의해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마음 놓고 침략하도록 종용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4의 적성 국가는 소련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 정권으로 하여금 한국전쟁을 일으키도록 승인했을 뿐 아니라, 막대한 무기를 제공하여 배후에서 북한의 남침을 조종했기 때문이지요. 다섯째, 제3에 이어서 제5의 적성국으로 또한 미국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유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소련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본을 무장 해제시킨 공동의 한 축으로서, 소련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에 결정적 무기인 탱크 250여 대를 무상으로 북한에 주었습니다. 또한 전쟁 발발과 동시에 250여 대의 탱크를 더 주어 북한군의 탱크가 도합 500여 대에 이르게 하여, 결정적으로 대한민국이 침략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대포 등 다 연발 기관총(따발총)을 북한에 제공하여, 남한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기들을 보유했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우리에게 고작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사용해 온 폐기대상 무기인 칼빈 총과 M1 소총 등을 겨우 10만 군대도 무장할 수 없을 정도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 발발 수일 만에 낙동강까지 쫓겨 가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남북을 합쳐 무려 100여만 명에 달하는 민·관·군(民官軍)의 인명 살상을 당해야 했고,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는 참상의 6,25 전란을 겪었습니다.

물론 미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뒤늦게라도 참전해 준 것은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한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보아, 이 땅에 소련, 중국의 공산화 팽창 정책을 막기 위한 극동 방위전략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합법적으로 진주하기 위해, 북한으로 하여금 침략해 오도록 하는 전략 적인 흉계로 무기를 제공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미군이 무력으로 한국에 주둔한다면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를 학수고대 하며 기다리다가, 전쟁이 발생하면 즉각 파병하여 그 여세를 몰아 한국에 군사 기지를 건설한다는 속셈이었다면, 그것은 간접 침략에 해당 한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그런 속셈으로 북한이 무적의 탱크 250대로 무장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에는 대응할 무기를 전혀 제공하지 않은 채 북한이 침략 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우방이 아닙니다. 어쩌면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는 명분으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을 수는 있었을 테지만, 그 명분을 갖추기 위해 대한민국 영토가 초토화 되고 100만에 달하는 인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한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 발발을 학수고대 하며 회심에 찬 노림수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마땅히 대한민국에게는 준 적성국일 것입니다.

미군이 평화적으로 한반도에 진입하는 방법은 찾아보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기아 상태에 허덕이는 남한 국민에게 산업화 지원 등, 가령 전쟁 비용만큼 한반도의 경제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島嶼(도서) 지역이나 내륙 오지의 필요한 일정 면적의 땅을 조차(租借)하여 미군 기지를 건설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는 미군의 한국 주둔을 희망하는 청원 형식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찬반 투표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교섭 방법도 연구해 본다면 여러 가지 수단이 분명 있었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극동 정책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측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다른 평화적 수단을 도외시하고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맥아더는 북한으로부터의 전쟁 징후가 전혀 없다고 장담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 1월 12일에 미국 국무장관이 소위 에치슨라인(Acheson Line)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 요지는 미국의 극동 방어 구역은 일본과 아류산열도 만을 지키고 한반도를 방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엔 미국이 한반도의 가치를 몰랐다는 주장도 있고, 소련이 무서워서 방어 지역을 후퇴했다는 등 학자들의 견해가 다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에치슨라인’ 선언이 있고 난 5개월 후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군대를 투입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르기까지 무려 3년간이나 북한과 중공군을 상대로 싸워서, 한국전쟁을 휴전하는 정전협정 조인의 당사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서 미국의 군사 기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써 미국이 대한민국을 포기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견해는 틀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리란 예측을 못 했던 것은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에치슨라인 발표는 미국 국무장관이 사석에서 말한 개인의 견해도 아닙니다. 미국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주무장관이 UN 본부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대한민국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위도 상으로 대한민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이라는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한 사실을 두고 미국의 단순한 실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북한으로 하여금 빨리 남한을 침략하라는 전쟁 유도 발언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43회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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