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과 신념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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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과 신념의 충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3.12.1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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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타임즈] 논설위원 최수호 = 우리는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을 늘 다르게 취급하며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상황에 대응하는 진정성은 느껴볼 수 있지만 반응태도를 객관적 진실로 가늠해 보기란 어렵다.

이를 테면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알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남을 원망하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의식을 하면서도 첫인상이 더러우면 싫어하는 감정을 느끼고 거부하곤 한다.

이처럼 우리는 진실로 실재하는 실상이 아니어도 마치 가짜가 아닌 진짜로 느껴서 반응하고 만다.

이를 테면 “첫인상이 혐오스럽다고 반드시 위협적인 사람만은 아님을 올바로 느끼도록 하라”고 그 당위성을 아무리 강요한다 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여 이렇게 느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해대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진정성을 부정하라고 억측으로 생떼 쓰는 무뢰한 짓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적 진실일 수 없다고 해서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실상을 올바로 인식하는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신을 증명할 수는 없어도 진정한 신앙은 가질 수 있고 확연히 보여줄 수는 없어도 착하게 사는 게 좋은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다.

이렇듯이 증명된 확실한 ‘진리’일 수는 없다 해도 자기 믿음인 ‘신념’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환상일지라도 그 믿음에 대한 열정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신념을 맹신하는 자들은 자기 확신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 신심(信心)에 대한 소신에 빠져버린 삶은 그들이 믿는 것이 곧 진리이므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따르기 때문에 이들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념을 쫓는 삶은 자기가 옳아서가 아니라 자기식이 좋아서 제식대로만 사는 것임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함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신념의 당위성 안에서 주체성을 소멸하는 삶을 살면서도 남들도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막무가내로 자기식 고집을 부리면서 갈등을 유발하곤 한다.

하지만 올바른 신념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꿰뚫어 알고 있기 때문에 설득은 하지만 강요하지 않고 남이 옳으면 설복될 수도 있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은 피력은 하되 강요하지 않고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고 서로의 견해를 간섭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믿음을 가졌다 해도 문제될게 없다.

오히려 다양한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 삶이 풍요로워진다.

누구든 자신의 신념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신념은 각자의 마음에서 생기므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남의 신념을 억압하고 자신의 신념을 강요할 권리는 없으며 신념의 유연성을 지켜내려면 신념이 강하다는 것과 배타적인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줄 알라.

그렇다고 자기 확신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신념이 약하다는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강한 신념의 소유자는 자기 경험의 진정성에 의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믿음을 가졌다고 해도 서로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지의 공감이 이루지게 된다.

그럴 때 상호배타적인 생각과 태도로 서로 문제를 일으켜 갈등을 빚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지 증거가 없어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진짜’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 ‘진짜’가 환각이었을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이고 아니고는 문제될게 없으며 자신의 체험으로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가치 있는 확신으로 스스로 믿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진짜’이어야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다른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주장을 억압하려 하고, 자기주장이 안통하면 화를 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배와 접근, 순종과 회피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유연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도록 자기식 신념에만 얽매여 진정성과의 충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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