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귀뚜라미와 단풍
상태바
가을 귀뚜라미와 단풍
  • 광주타임즈
  • 승인 2015.10.06 1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타임즈]논설위원 고운석=오늘날엔 추분츰에 모기가 들어가지만, 옛적엔 처서에 모기가 들어가고 귀뚜라미가 온다는 절기다.
이날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만난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 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네”하고, 톱은 뭣에 쓰려고 가져가느냐고 귀뚜라미에 묻는다. “추야장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 낭군 애(창자)끊으러 가져간다.” 남도(南道)의 우화성(寓話性) 민요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단장(斷腸), 곧 애끓는 톱소리로 듣는다는 것은 극도로 세련된 우리 전통적 정서의 한 유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하면 목석 같은 사나이도 괜히 슬퍼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옛 선비는 과거길에 오르거나 타향에 벼슬살이 갈 때 고향의 귀뚜라미를 풀섶에 담아 들고 가서 창변에서 울려두고 고향의 소리를 듣는 풍류가 있었던 것이다. 소음공해가 없었던 옛날에는 청각이 예민했던지 관북(關北) 귀뚜라미 소리 다르고 호남(湖南) 귀뚜라미 소리가 다르다 하여, 서울 목로집 처마에는 향토색을 우는 귀뚜라미를 울려두고 향수유객을 했을 정도라니, 이토록 세련된 벌레문화가 이 세상 어떤 나라에 있었을까 싶다. 이처럼 우리 한국 사람은 귀뚜라미를 정서적으로 이용하는데, 딴 나라 사람들은 실용적으로 이용한다. 중국에서는 투견, 투계를 하듯이 귀뚜라미로 투충을 하여 도박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을에 귀뚜라미를 가지고 향수유객(鄕愁誘客)만 한게 아니다. 단풍유람이나 단풍 민속을 보면 경의롭다. 옛 서민이 불렀던 잡가(雜歌)의 단풍유람을 보자. “저기 가는 저 길손 말 물어보세. 한로(寒露)철 풍악 풍광 곱던가 밉던가. 곱고 밉기 전에 아파서 못 노릴레라. 가지마오. 만산홍엽 불이 붙어 살을 데고 오장이 익어 아파서 못 노닐레라. 못 노릴레라.” 단풍에 화상을 입는다는 피부감촉적인 표현이 그 얼마나 멋있는가. 동서고금에 가을 단풍의 미를 이처럼 살에 닿게 읊는 시가 또 어디 있었던가 싶다.

풍악은 국토가 잘리어 가지 못하지만 그 연맥인 설악 단풍에 심신을 데이고자 황금연휴나 기타 휴일이면 수십만명의 대이동이 벌어질 것이라 한다. 호남에 내장산이나 백양사의 단풍도 있지만, 설악은 우리나라 단풍전선의 시발점이다. 설악 주봉인 대청봉에는 9월 하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 하루에 약 50미터 속도로 하강. 지금쯤은 표고 1천미터대가 가장 붉게 타고 있을 것이다. 수직하강 속도가 50미터라면 수평으로 하루에 25킬로미터씩 남하, 남부지방은 시월 중순부터 하순에 피크를 이룬다. 그래서 단풍이 한달 동안 머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단풍 시한(時限)이 긴 혜택받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단풍에 따른 민속도 발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사(古寺)의 깡마른 노승(老僧)이 절의 마당에서 단풍잎 긁어모아 선차(禪茶)를 끓이는 모습이 옛 시나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데, 단지 멋으로 단풍잎을 태우는 것만은 아니다. 단풍가랑잎만을 따로 모두어 두었다가 차나 약을 달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붉은 빛이 사악한 기운이나 귀신을 쫓는다는 주술의 사고에서 붉은 단풍잎으로 달이면 차맛이 보다 정화되고 약 기운이 더 돋을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음력 9월 9일 중양(重陽)날 산에 올라 단풍나무로 비녀를 깎아 아내에게 꽂아주는 풍류를 풍잠이라 했는데, 이렇게 하면 시집살이로 쌓은 일년 울증이 사라지고 히히해해 명랑해진다고 알았다. 단풍이 이처럼 전통적 스트레스 해소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연휴에 단풍구경 떠나는 가을 벗님네들, 부디 연중 쌓였던 울증을 풀고 명랑해져 오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