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詩人 曰 ‘신의 없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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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詩人 曰 ‘신의 없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 광주타임즈
  • 승인 2018.08.1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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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타임즈]민화협 중앙집행 위원장·시인 나일환=마음 가난한 시인은 신의도 없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사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다. 뜨겁고 뜨거운 욕망이 가득한 불행한 인간들이 대의를 논하고 명분을 앞세우는가? 보라, 이세상의 변화무쌍한 현상을, 그리고 어떤 죄 값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 용광로 곁에 있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입추가 지나고도 멈추지 않는다. 다행히 밤에는 가을 날씨를 되찾은 듯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계절의 변화도 이제는 지구의 온난화로 예측불가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변화하듯 인간이 마음도 수시로 변화 하는가보다. 믿음과 신뢰가 무너진 세상에서 그 무엇을 약속하고 변화 시킬 수 있을까? 인간이 갖어야 할 근본이 사라지고 지존이 무너지면 남는 것은 생각도 느낌도 없는 맛도 없고 멋도 없는 무생물 그대로의 삶일 것이다.

서로가 믿음을 줄 수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지옥이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인간은 서로 돕고 의지하며 뜻을 함께하며 미완에서 완성의 길로 접어든다. 짧다면 짧은 인생이요, 길 다면 긴 삶인데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삶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명예도, 돈도 , 권력도 아닌 인간다운 삶의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다감이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은 바로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서로믿음이 사라진 사회는 정말 불행한 사회다. 그곳에는 적폐가 만연하고 불행의 씨앗이 출몰하여 세상을 어두운 골짜기로 함몰시킬 것이다. 내 가족을 믿지 못하고 나를 낳은 부모에게 불효하며 내 이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 친구를 배신하는 사람들이 어찌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대의에 동참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평화를 갈구하고 서로의 행복한 공존을 바라고 있다. 그러기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고 금같이 귀한 시간을 쪼개가며 대의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있다.

그러나 몇몇 얄팍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위해 주위를 살피지 않고 악 날 하고 야비한 수법으로 이웃을 험담하고 있지도 않는 사실을 사실인양 허위와 거짓으로 짓밟고 과장해서 주위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자들이 권력을 갖는다면 세상은 어둡고 험악하기만 할 것이다. 원불교 2대 종법사를 역임한 정산(鼎山) 종사님은 ‘세간의 재판에도 삼심(三審)이 있듯이 법계(法界)의 재판에도 삼심이 있나니, 초심은 양심의 판정이요, 2심은 대중의 판정이요, 3심은 진리의 판정이라, 이 세 가지 판정을 통하여 저 지은대로 죄값도 틀림없이 받게 되나니, 이것이 세간의 재판만으로는 다 하기 어려운 절대 공정한 인과 재판이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 43장>했다.

우리자신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 내자신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행동과 생각들이 과연 나만을 위한길인지? 아니면 서로가 함께 공존하는 길인지 말이다. 안희정 판결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안희정의 마음에서 안희정의 생각들을 살피고 “안희정이 무죄라면 사법부는 유죄”라며 재판부 선고에 항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보면서 어떤 판단이 옳음인가? 인간으로써의 인간적인 유혹의 감정들과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명분이 없는 행동을 한 안희정의 행동들을 한 인간안희정을 판단할 것인가 대권주자의 한사람으로 공인 안희정으로 보고 판단할 것인가? 우리는 한 개인의 욕망보다는 함께하는 공동체로써의 선택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의고 명분인 것이다.

우리는 인과응보라는 말을 불가에서 많이 듣는다. 인과응보는 진리다. 인과응보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원인과 결과 는 인연 따라 간다.세상에는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는 하나인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려면 원인이 반듯이 있어야 하듯 말이다. 인간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 좋은일 후에는 반듯이 나쁜 일도 함께 따라온다. 음과 양의 조화가 인간의 삶에도 적용됨을 우리는 항상 느끼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면하면서도 무감각하다. 좋은 일 뒤에 오는 슬픔을 대비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불가에서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속에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고 바로 여기에 관련된 법칙이 연기(緣起)인 것이다. 또한 과보(果報)가 나타나는 시기를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순현보(順現報),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를 말한다. 순현보는 금생의 죗값을 금생에 받는 것이요, 순생보는 생을 따라서 과보를 받는 것이요, 순후보는 전생에 지은 것을 금생에 안 받고 금생에 지은 것을 내생에 받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때가 되면 반듯이 그 죄 값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인간이 만든 법으로 인간을 심판하면 잘못된 죄 값을 받을 수 있지만 진리의 법은 선과악의 구분이 분명하여 지은 죄 값은 반듯이 받는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이 살아온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생활습성이 의식화되고 행동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말하여도 자신은 그것이 정당하다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보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우월함을 앞세우며 대의를 버리고 명분도 없는 우월주의에 빠져 죄를 짓고 만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가 정의로운 지혜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모두가 내 탓이요, 내부덕의 소치라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세상은 바로 극락이요, 천국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가을날 새벽에 마음 가난한 시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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